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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황매산 철쭉길, 10년 전의 기억

by 눌산 201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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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꽃과 진달래가 떠나고 신록이 우거질 무렵이면 철쭉이 핀다. 때는 바야흐로 철쭉 철이다. 남쪽의 지리산 바래봉과 합천 황매산 철쭉이 절정에 달했고, 점점 북상해 이번 주말이면 소백산과 정선의 두위봉을 점령하게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기상이변이라지만, 자연은 말없이 제 몪을 하고 있다.

오랜만에 황매산에 올랐다. 예상은 했지만, 주중인데도 인산인해다.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단체산행객들의 눈쌀 찌뿌리는 행동까지도 용서될 만큼 멋지다. 무슨 단체에서 왔는지 축제 무대를 점령해 노래자랑을 하고 있다. 무대에는 대형 태극기와 단체 깃발을 세워 놓고 말이다. 태극기 흔들면 다 애국잔가? 작은 배려도 없는 그런 행동을 하면서 말이다. 황매산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장'이었단 얘기는 어디서 들었나 보다. 아무튼 오늘은 봐 준다. 10년 만에 오른 황매산이 아니던가.

10여 년 전 친구들과 황매산의 아침을 만난 적이 있다.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에 드 넓은 초원을 전세내서 말이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만났고, 아침햇살에 빛나는 노란 루드베키아 군락에 밤새 마신 술이 확 깨버렸다. 그 때 몽골 초원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초록의 초원에는 지금 붉은 철쭉이 피어 있다. 


뚜렷한 계절의 변화가 주는 마음의 여유를 맘껏 즐기기 좋은 날씨다. 파란 하늘빛과 그 위를 떠다니는 구름 몇 점, 길 위에 홀로 선 여행자에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드넓은 초원과 바위산의 독특함

88올림픽 고속도로에 접어들면 그런대로 한가로움이 있다. 편도 1차선이 주는 느린 속도가 운전의 피로도 덜할 뿐더러 이것저것 둘러볼 수가 있어서 일게다. 거창 나들목을 나와 고속도로를 벗어나면 가을 분위기 완연한 들녘 풍경이 기다린다. 합천 땅에 들어서면 지리산이 가까워서 인지 산세가 육중함을 느낄 수 있다. 먼저 합천호에 몸을 반쯤 담근 오도산을 끼고 도는 지방도로를 타고 읍내를 벗어나며 만나는 걸출한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황매산(1108m)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촬영한 곳으로 알려지면서 곳곳에는 영화와 관련된 명소들이 들어서 있다.

산으로 오르는 길, 흙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길을 오른다. 계곡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이런 길을 걸어본지가 언제인가, 호젓한 혼자만의 사색의 시간을 가져본다. 어느 순간 드넓은 초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목장지대다. 해발 900m가 넘는 산정에서 젖소 떼 노니는 초원을 만나니 참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그 안에는 크고 작은 풀꽃들이 자리하고 있다. 풀썩 주저앉아 온 몸으로 바람을 맞아본다.

영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황매산은 드넓은 초원과 불끈 솟아 오른 암봉을 비롯하여 한꺼번에 여러 얼굴을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산이다. 느긋하게 풀밭에 주저앉아 하늘을 이불 삼아 오수를 즐겨도 좋고, 남성미 물씬 풍기는 바위 봉우리에 올라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합천호의 장쾌함에 취해보는 것도 좋다. 가슴 속 응어리까지 시원스럽게 풀어주는 맛이야말로 산에 올라 맛 볼 수 있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황매산은 '태극기 휘날리며' 이전 '단적비연수'란 영화로 먼저 알려졌다. 목장 반대편에 조성된 '영화주제공원'에는 촬영 후 세트를 그대로 보존해 산청군에서 공원으로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봤던 원시마을과 각각의 가옥에는 주제별로 배우들이 사용했던 칼과 활, 봉화대, 벽화 등이 보존되어 있다. 10개의 풍차나 은행나무 고목, 대장간 등도 영화 속 장면처럼 복원되어 있다. 그리고 예전 원시부족에서 사용했던 농기구 등도 함께 보존되어 있어 황매산 여행길에 찾아 볼만하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평양시가지 전투 장면을 찍은 셋트장은 합천댐 수문 바로 아래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두밀령 전투가 벌어진 곳이 황매산이다. 700m에서 900m를 오르내리는 고원 분지 위에 300m 바위 봉우리를 올려놓은 듯한 형상이 이색적이다. 바위산이 절경인 모산재(767m)와 북서쪽 능선을 타고 펼쳐지는 황매평전의 철쭉 군락은 황매산의 자랑. 세 개의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상삼봉에 오르면 드넓은 합천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황매산은 걸어서 올라야 한다. 자동차로 목장지대까지 오를 수 있지만 길이 워낙 험해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오도가도 못할 일. 너댓새간이면 정상 산행과 영화주제공원까지 두루 둘러볼 수 있다.

흐드러지게 핀 철쭉군락을 만나지 못해 서운하지만 이런 높은 고지에 푸른 초원과 그 속에 나뒹구는 들꽃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정이 아닌가. 해질 녘 벌겋게 달아오른 하늘빛이 장관이다. 풀밭도, 노란 들꽃도 온통 붉게 물들어간다. 요즘 같은 가을철에는 이른 아침이면 합천호의 물안개와 부딪치며 몸을 섞는 산 안개의 장관도 만날 수 있다.

<이 글은 10여 년 전 황매산에서 비박을 한 후 남긴 글이다.>


















































































땅 바닥에 놓인 카메라 셔터를 잘 못 눌렀다. 그런데 이 사진이 가장 맘에 든다.   









10년 전, 황매산




어느 순간, 나의 여행은 과거를 만나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 곳과 그 사람을 만나고, 그 때의 내가 되어 가는. 멋진 풍경은 사람을 감동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잊혀지기도 한다. 대신 그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은 내내 남아 있다.

다시, 10년 후 이 곳을 기억하게 된다면, 어제 황매산에서 만난 1,000원 짜리 하드 파는 아주머니가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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