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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칼럼

[주간조선] 이야기가 있는 소읍(小邑) 기행 6 / 전남 목포·강원 도계

by 눌산 2017.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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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소읍(小邑) 기행 여섯 번째 / 전라남도 목포·강원도 도계

겨울과 봄 사이 느린 도시에서 시간여행자가 되다

 

소읍(小邑) 뒷골목을 걷다 보면 언제나 화분 몇 개가 놓여 있는 곳이 있다. 스티로폼이나 고무대야도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텃밭 대용으로 보인다. 먼 걸음 하기 힘든 어머니의 텃밭이다.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을 발길 멈추고 허리 숙여 바라본다. 새순이 돋고 있다. 봄이 그리 머지않았다는 얘기리라. 어머니의 텃밭은 봄을 기다리는 중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 탄광도시 도계에서, 항구도시 목포의 뒷골목을 걸으며 수없이 만난 풍경이다. 산촌, 어촌 할 것 없이 우리 어머니들의 삶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근대문화유산의 보고(寶庫), 목포를 걷다
   
   남도 끝 항구도시 선창가에서 때 아닌 폭설을 만났다. 사실 한동안 산촌을 떠돌아다녔던 터라 따뜻한 봄기운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찾은 목포였다. 그런데 눈이 내린다. 처음엔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라, 걷기도 힘들 만큼 무지막지하게 쏟아진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 밤마실 삼아 목포의 밤거리 구경에 나선다.

목적지는 목포의 원(原)도심이다. 목포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도심으로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이다. 또한 근·현대 상권의 중심으로 여전히 항구를 들고 나는 사람들과 물자의 중심지다. 그런 이유로 숙소를 원도심 항구 주변으로 정했다. 늦은 밤에 더구나 폭설까지 내리는 상황이라 거리는 조용하다. 희미한 불빛을 찾아 들어간 곳은 허름한 실내포장마차. 중년의 사내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 여주인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손님 많응가?”
   
   “손님이 이쓰먼 나가 여그서 쏘주나 찌끄리고 있것소.”
   
   “뭔 눈이 요로케 많이도 온다냐 긍게 손님이 없제.”
   
   “아따 그랑께 울 애기 등록금도 몬 내고 있는디 큰일 나부렀소.”
   
   “오늘따라 뭔 쏘주가 이렇게 달다냐.”
   
   중년의 사내는 골목 술집에서 기타를 친다고 했다. 이즈음이 가장 비수기란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관광객들도 뜸하단다. 선원들도 강풍주의보 때문에 배가 뜨지 못해 선창에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항구 하면 북적거리는 인파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간판이 연상되지만 요즘 경기가 예전만 못한 듯싶다. 꽁꽁 묶인 어선들이 이곳이 항구도시라는 것을 말해줄 뿐, 늦은 밤 포구의 밤은 고요하다.

다음 날 눈발은 더 거세졌다. 몇 번을 망설이다 눈이 그칠 기미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길을 나선다. 원도심을 중심으로 한나절 정도면 목포의 근대문화유산을 돌아볼 수 있다. 숙소 문을 나서자 지난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낡은 골목이 보인다. ‘대호탕’이라는 오래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 주변은 새 건물뿐인데 간판이 가리키는 목욕탕 건물은 찾아볼 수 없어 옆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여그가 목포서는 제일 첨 생긴 최신 목욕탕이여.” 50~60년 전에 문을 열었고 15년 전쯤에 문을 닫았다. 진도와 완도가 연륙(連陸)이 되기 전, 그러니까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기 전에는 진도·완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목포를 오갔다. 배가 들어오는 새벽이면 골목 안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뱃길의 피로를 풀기 위해 사람들은 목욕탕으로 몰려갔고, 고기잡이에 필요한 선구나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골목 안 상가에는 섬사람들로 북적거렸다. 1960년대 얘기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서 쇠락의 길을 걸었고, 현재는 간판만 남아 있어 그 시절의 영화(榮華)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옆 일제강점기 본정통(本町通)으로 통했던 궁다방 사거리에는 ‘구도심 랜드마크 천일약국 址’ 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목조 일색인 골목 주변에서 보기 드문 현대식 콘크리트 4층 건물이다. 이 외에도 백화점이었던 화실 건물과 구(舊) 호남은행 건물인 목포문화원이 선창에서 목포역 방향으로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다. 

 

 


   
   손에 목포 관광지도가 들려 있지만, 지도를 보고 어디를 찾아간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일제강점기 일인(日人)들 의해 조성된 상업지역 골목은 바둑판처럼 반듯하면서도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도를 무시하고 무작정 걷다 찾아 들어간 곳이 문화예술협동조합 ‘나무숲’이다. 목포 지역 예술가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지역공동체로 회화, 조각, 공예, 문학 등 30여명의 지역 작가들의 공간이다. 전시장을 지키고 있는 최응재 이사를 만났다. 
   
   “지역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공동체 활동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습니다. 굳이 이 장소를 택했던 것은 목포 근대문화의 출발지이기 때문이죠. 20여년 전부터 비어 있던 건물을 작가들이 손수 수리해서 입주했답니다. 합판으로 막아 놓은 천장을 뜯어냈더니 퇴색된 서까래 원목이 숨어 있었어요. 이 골목 건물들 대부분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사람들이 사용하던 건물이지만, 사실 원형이 제대로 보존된 곳은 보기 드문데, 이 건물은 구석구석 당시의 건축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전시장으로 쓰이는 2층은 다다미방이다. 당시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침실과 서재 등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손수 조각한 벽 장식물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희귀한 경우라고 한다. 건축물 대장에 1935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최소 80년 이상 된 건물로 작가들의 작품 감상뿐 아니라 일본식 건물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문화재로 등록된 일본식 건물보다 더 생생한 당시 건축물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창작공간 ‘나무숲’ 옆에는 갑자년인 1924년 문을 열었다는 갑자옥(甲子屋) 모자점이 있다. 무려 9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집이다. 작고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태훈씨가 여전히 문을 열고 있다.

 “여기가 선창에서 가까우니까 주로 섬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이젠 오래된 단골들도 통 안 보이네요. 늙거나 죽거나 했겠지요. 허허. 그냥 문만 열고 있어요.”
   
   아침 일찍 찾아간 낯선 이를 친절하게 대해주신 사장님이 고마워 “눈이 너무 많이 오네요. 모자를 안 갖고 와서…” 하며 그날의 첫 손님이 되어 갑자옥을 나섰다. 

   
   문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린다. 선창에서부터 걷는 내내 길에서 마주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갑자옥 모자점에서 바로 이어지는 민어거리에서 만난 민어집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오메, 겨울도 다 갔는디 뭔 눈이 요로케 많이 온다냐. 눈 구경 제대로 해서 좋긴 헌디 오늘 장사는 글러부렀네.” 목포 9미(味) 중 하나인 민어는 쫄깃하고 달콤한 맛으로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횟감으로 친다. ‘민어거리’ 안내판이 걸릴 만큼 목포는 민어의 본고장으로 민어 요리를 내는 식당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 형성돼 있다.
   
   유달산 자락 일본인 거주지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이 선창을 바라보고 있다. 목포의 근대문화를 한곳에 모아 놓은 근대역사관 1관이다.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고 1900년에 지어진 일본영사관 건물로 목포 최초의 서구식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우리 민족을 수탈하는 첨병이 되었던, 목포 시민들의 한과 슬픔을 간직한 건물로 광복 이후 목포부청사,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건물 입구 도로변에는 원래 목포에서 평안북도 신의주시까지였지만 현재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까지밖에 갈 수 없는 1번 국도와, 역시 목포에서 부산까지 구간인 2번 국도의 기점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상징적 의미지만 1번과 2번 국도의 출발점이 모두 목포다. 맞은편 주택가에 있는 2관은 동양척식주식회사로 쓰였던 건물로 내부에는 예전에 금고로 쓰던 방과 목포의 근대사를 엿볼 수 있는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목포 시가지와 항구의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유달산에 올랐지만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눈보라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 목포역으로 내려선다. 목포역에서 100여m 거리에 있는 오거리는 일제강점기 목포 근대도시문화의 중심지였다. 식당·사진관·악기점·서점·여관·은행·신문사 등이 들어섰고 문화예술인들의 활동 공간이기도 했다.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코롬방제과점과 중깐으로 유명한 중화루, 문화센터가 된 일본식 사찰 동본원사 목포별원, 구도심 최고의 번화가인 ‘차 없는 거리’가 모두 오거리 근처에 있다. 

 

 


 
  

여행 Tip
   
   목포시에서는 근대사의 중심 목원동(원도심)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목원동 100년 전 골목 여행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골목길 해설사를 양성해 탐방을 희망하는 단체(10인 이상)에 한해 목포시 도시재생지원센터(061-243-8994)로 연락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목포의 근대문화유산은 일본인과 조선인 거주지역, 일본식 건축물과 한옥 등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일본식 건축물은 대부분 역사관 같은 전시공간으로 쓰이고, 한옥은 게스트하우스로도 활용하고 있다. 한옥 게스트하우스로 목포1935(061-243-1935)와 유정한옥(010-9317-5457)이 있다. 목포 최초의 제과점으로 크림치즈바게트가 유명한 코롬방과 ‘중화루 간짜장’의 준말이라고 하는 ‘중깐’으로 소문난 중화루가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골목에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시속 25㎞의느린 여행, 탄광도시 강원 도계
   
   겨울의 한복판에서 도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2004년 개봉한 국내 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이 떠올랐다. 절망에 빠진 교향악단 트럼펫 연주자 현우(최민식 분)는 탄광촌 도계의 한 중학교 관악부 임시교사로 부임한다. 전국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해산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의 관악부 아이들에게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발견하고는 그 아이들에게 음악을 되찾아주는 과정을 통해 겨울 같았던 자신의 인생에 비로소 따스한 봄이 찾아옴을 느끼게 된다는 내용이다. 탄광촌, 쇠락, 탄가루 뒤집어쓴 새카만 땅, 도계에 대한 첫 이미지다. 아마도 영화에서처럼 도계 사람들은 따스한 봄날의 꿈을 꾸고 있지 않을까. 

 

 
   
   태백시와 삼척시 경계인 통리에서 한없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즉 오르막은 없고 내리막만 있는 셈이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만큼 거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생성 과정이나 지질학적 특성이 비슷해서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부르는 통리협곡이다. 길이는 약 10㎞로 도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협곡이다. 통리는 사방에 산이 높고 그 가운데에 골짜기가 길게 형성된 것이 마치 구유처럼 보이기 때문에 유래한 지명으로 통리 삼거리에서 약 1㎞ 거리에 있는 휴게소에서 내려다보면 협곡의 장관을 만날 수 있다. 


   
   “땡, 땡, 땡.”
   
   열차가 곧 올 것이라는 신호가 울리고 철도 건널목을 건너던 차들이 일제히 멈춰 선다. 그리고 잠시 후 느린, 아주 느린 열차가 건널목 앞을 지나간다. 상황 판단이 안 되는 운전자라면 이 느린 열차가 통과하는 동안 속이 터질 일이다. 이 시간 나는 여행자다.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빨라지고 한적한 국도로 내려서면 느긋해지는 것이 진리다. 서두를 것 없는 여행길에 만난 느린 열차는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건널목에서 만난 느린 열차는 스위치백 트레인이다. 스위치백트레인은 통리협곡의 기차테마파크인 추추파크에서 나한정역까지 시속 25㎞의 속도로 6.8㎞ 구간을 왕복 운행한다. 폐선 구간을 운행하는 관광열차로 스위치백(switchback)이란 ‘자세를 반대로 바꾸다’라는 뜻이다. 경사가 가파른 산악지역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레일을 지그재그 모양으로 설치해 열차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면서 운행한다. 통리와 도계의 표고 차가 무려 435m에 이르다 보니 궁여지책이었던 셈이다. 오래전에 사라진 ‘인클라인’ 철도도 바로 이 구간에 있었다. 1940년 철도 건설 당시 스위치백 같은 우회 철길을 놓을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급경사 비탈에 직선 철길을 놓고 위쪽인 통리역에서 일명 ‘강삭철도’라고도 하는 ‘인클라인’ 방식으로 와이어로프를 이용해 열차를 끌어올렸다. 이때 나온 말이 ‘보릿고개보다 통리 고개 넘기가 더 힘들다’였다. 열차를 끌어올리는 동안 그 구간은 열차에서 내려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인클라인 트레인은 추추파크에 설치되어 있다. 이 외에도 추추파크에는 레일바이크와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추추트레인을 타고 온 관광객들은 나한정역에서 내려 ‘희한한’ 열차 이야기와 탄광촌의 흔적들을 돌아본다. 폐역이 된 나한정역에는 쓸쓸함이 가득하지만 역사(驛舍)에는 작은 커피가게가 있어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폐광지역 지원 사업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받은 광부들이 운영한다.

나한정역을 지나면 도계읍 소재지다. 시커먼 탄가루를 뒤집어쓴 도계역 뒷산에서는 여전히 석탄을 캐낸다. 도계광업소가 문을 연 것이 1936년부터니까 81년째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영화로웠던 탄광도시의 면모를 찾기란 쉽지 않다. 석탄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1989년 이후 탄광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도계의 봄날’도 여기까지다. 한때 인구 5만에 이르렀던 탄광도시 도계는 인구 1만2000여명의 소읍이 되었다. 
   
   저탄장 아래 ‘까막골’에서 만난 탄부 출신 김아무개씨는 “1970년대만 해도 인구가 6만에 육박했지. 당시에는 도계를 ‘팔도공화국’이라 불렀어. 전국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니까.” 까막골이란 마을 이름 역시 탄광의 흔적이다. 새까만 석탄가루로 뒤덮인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저탄장이 바로 옆에 있다 보니 담장과 지붕, 심지어 콘크리트 바닥, 텃밭의 땅도 새까맣다. 딱 한 사람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 이리저리 이어진다. 낮은 지붕 처마가 눈높이와 같다. 구경 삼아 돌아본다는 게 민망해진다. 하지만 ‘까막골’은 탄광촌의 소중한 유물이다. 이 땅의 석탄산업을 이끌었던 탄부들의 생활터전이었다. 동네 초입에는 도계역 급수탑이 서 있다. 일제강점기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로 2003년 등록문화재(제46호)로 지정됐다. 1940년에 설치된 강원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급수탑으로 다른 급수탑에 비해 높이가 상당히 낮은 8m다. 그 이유는 철로 면보다 4m가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어 적정수압을 얻어낼 수 있도록 높이를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도계 사람들에게 탄광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흥전리 ‘도계 유리마을’의 유리공예가인 도계 토박이 김수미씨는 탄광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도계의 모든 것’이라고 했다. 도계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 줄곧 도계를 떠나지 않았다는 김수미씨의 부친 역시 탄부였다. 활황기 시절 가장 잘나가던 도계의 모습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탄광은 언제나 삶의 곁에서 함께했다. 현재 하고 있는 유리공예 역시 도계에서만 나온다는 석탄의 잔류석(폐석)을 유리 원료로 쓰고 있다. 발열량이 낮아 버려졌던 폐석탄이지만 사암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매혹적인 초록빛의 유리 제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고 한다. 
   
   유리마을의 도계유리공예협동조합은 도계 지역의 유리공예가들로 구성된 국내 유일의 유리공예조합이다. 김수미씨는 “유리공예의 매력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든 것을 유리로 다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무한한 상상력과 작가의 개성이 창작으로 이어져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으로 탄생한다. 1300도의 고온으로 유리를 가열해 천천히 녹여가며 만드는 램프워킹, 팽창률에 맞는 각종 색유리를 유리칼로 잘라 원하는 형태로 구성한 후 가마에 넣어 열을 가해 녹여 만드는 퓨징기법 등 다양한 기법을 이용한다. 직접 유리공예품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먼저 찾았던 까막골에서 유리로 만든 문패가 집집마다 걸려 있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는데 바로 이곳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유리마을이 있는 흥전리 철도변에는 ‘흥전 국민주택지구’라고 불리는, 조성된 지 40년이 넘은 광부사택 마을이 있다. 탄광과 탄부들의 일상을 벽화로 표현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탄광마을답게 대부분 연탄보일러를 쓴다. 한겨울 수북이 쌓여 있는 연탄더미를 보는 것이 다른 지역에서는 낯선 풍경이 되었지만, 도계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도계를 지나는 38번 국도는 오십천과 함께 협착한 골짜기를 비집고 흘러 동해로 빠져나간다. 긴 터널과도 같은 협곡을 벗어나는 순간 탁 트인 바다를 만난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산촌의 풍경과 어촌이 공존하는 삼척이 지닌 지형적 특성이 극과 극을 달리는 순간이다. 요즘 한창 4차선 확장공사 마무리 단계에 있는 38번 국도를 따라가다 잠시 샛길로 접어들면 보기만 해도 앙증 맞은 기차역 하고사리역을 만날 수 있다. 

 

 

 

여행 Tip
   
   춘천이 닭갈비의 고장이라면 도계는 물닭갈비의 고장이다. 깻잎, 쑥갓, 부추가 듬뿍 들어간 얼큰한 국물 맛이 특징이다. 독특한 간판을 내건 ‘텃밭에 노는 닭’(033-541-9989)에서 물닭갈비를 전문으로 낸다. 도계1리 마을회관 바로 앞에 있다. 흥전리 유리마을의 도계유리공예협동조합(033-541-6259)에서는 램프워킹·글라스샌딩·퓨징접시 체험이 가능하고 사전연락과 예약은 필수다.

 

[글·사진]  눌산 여행작가

 

주간조선 [2448호] 2017. 3. 13 발행

--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44810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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