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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오지

삼십리 골짜기 끄트머리에서 만난 '사람의 마을' <강원도 인제 연가리골>

by 눌산 2008.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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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일까. 아마 오지마을이 아닌가 싶다. 현대 문명과는 동떨어진 자연에 가장 가까운 삶을 영위하는 곳 또한 오지마을이라 할 수 있다.

핸드폰도 필요 없고, 컴퓨터도 필요없는 이 땅의 속살을 찾아가 본다.


눈 녹은 물이 흐르는 연가리 계곡에서 만난 돌단풍 새순


하늘과 맞닿은 골짜기 끄트머리에 사람의 마을이 있었다. 


연가리골은 유독 산세가 부드럽다. 인접한 아침가리 곁가리 명지거리 모두가 걸출한 산봉우리를 머리에 이고 있지만 연가리골의 끝은 백두대간 주능선이 지난다. 정상은 따로 없지만 해발 1천m를 오르내리는 백두대간 주릉이 휘감고 있어 골이 시작되는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맞바우 마을부터 시작해 끝이 나는 백두대간 주능선상까지 오르막을 느낄 수 없는 완만한 경사의 계곡 길은 쉬엄쉬엄 걷기에 딱 좋다. 한때는 50여호가 오손도손 모여 살았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쓰러진 폐가옥만이 그 흔적을 말해줄 뿐이다. 간간이 발길을 붙잡는 옛 집터의 흔적들은 '누가 살았을까, 어떤 연유로 이 깊은 골짝까지 흘러들게 만들었을까.'라는 끝없는 의문과 함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게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다.

 

 4월이 한창이지만 계곡에는 눈이 쌓여 있다.


연가리골의 들목은 내린천의 상류인 70리 진동계곡 중류이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가 있었으나 홍수로 떠내려가고, 지금은 발길에 닳고닳은 징검다리를 건너다닌다. 국내 최대 원시림 보호지역이라는 점봉산과 방태산 줄기를 양어깨에 걸머진 골의 입구는 수림에 가려 좀체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양손을 펼쳐 원시림을 헤치면 앉은 듯, 누운 듯 자리한 연가리골의 모습은 드러나고 30리 긴 골짜기의 문이 열린다. 이른 봄 복수초를 비롯해 얼레지, 노루귀, 바람꽃 등 온갖 풀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골이 깊은 연가리골은 사철 청정옥수가 흐른다.


사철 마르지 않는 계곡의 물


골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내 원시림의 진면목인 울창한 수림이 마음을 느긋하게 만든다. 발걸음부터 천천히, 수십년 세월 깊은 잠에 빠진 생명체들을 깨우진 않을까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내딛게 만든다. 한때 '사람의 마을'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금낭화 무리가 반갑게 맞이한다. 잠시 사람이 빌려쓰고 떠난 자리는 태초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얼마나 올랐을까, 우레와 같은 물소리가 발목을 잡는다. 5단 폭포의 수직으로 쏟아지던 물줄기가 길게 드러누워 똬리를 틀고 흐른다. 요란한 물소리에 하늘의 구름도 바람도 잠시 멈춘다. '사람의 마을'이었을 때는 한여름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폭포를 찾았을 것이다. 어른들은 나뭇그늘에 둘러앉아 장기를 두었을 것이고, 발가벗은 아이들은 물놀이에 해가 저무는 줄 몰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떠난 지금 검푸른 이끼에 쌓인 바위가 던져주는 신비스러움과 함께 자연은 자연 그대로 일 때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연가리골에는 크고 작은 폭포가 수십 개나 된다. 골이 깊고 길다보니 긴 세월 물 흐름이 만들어 낸 물길은 이렇게 아름답게 남아 있다.


곳곳에서 사람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원시림은 자연 생태계의 寶庫


산이 높으면 나무가 많다. 또한 사철 마르지 않는 계곡의 물은 언제가도 철철 넘쳐흐른다. 나무의 몸속에 저장된 수분을 갈수기에 배출해 적당한 물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신비는 감히 인간이 범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예전의 무분별한 개발은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왔지만 이제는 원시림이란 표현을 써도 될 만큼 넉넉한 숲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시 근교의 산은 아직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 100年을 내다보는 지혜가 아쉽기만 하다.

사람이 떠나고 남은 연가리골은 자연 생태계의 寶庫가 되었다. 계곡에는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와 수달을 비롯해 냉수성 어류가 살고, 역시 천연기념물인 금강초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 협소한 골짜기에 50여 가구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지천으로 널린 산나물 덕분이었다. 이른봄의 새순은 못 먹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맛으로나 향으로나 나물의 왕으로 치는 곰취나 참나물, 나물취, 얼레지 등이 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산나물 채취는 한달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생나물을 삶고 말리면 묵나물로 1년 내내 귀중한 양식이 된다.


 잔설이 녹기 시작하는 4월이면 키작은 풀꽃들의 세상이 펼쳐진다. 얼레지


두어 시간쯤 올랐을까, 한눈에 집터였음직한 넓은 분지가 나온다. 지금은 심마니들의 움막으로 사용되는 구들장도 보이고, 반쯤 허물어진 돌담 곁으로는 그릇 조각이 나뒹군다. 계곡가 고목 아래로는 산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산꾼들의 제단이 바람에 날린 양철지붕으로 덮여있다. 떠난 자리의 흔적이 크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현재 연가리골의 주민은 김xx 할아버지와 추xx 할머니가 전부다. 51年 한국 전쟁 당시 피난지인 이곳에서 만나 평생을 연가리골에서 살아오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손도손 모여 살던 그때가 그립다고 하신다.

구석구석 골 골마다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 없다지만 연가리는 피난지다운 지형지세와 삶의 터전들이 있었다. 부족한 농토는 산비탈을 개간해 火田을 일구었고, 봄에 나는 산나물이며 약초는 생활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간 사람들, 한과 서러움을 간직한 피난민도 있었고 그저 궁핍한 생활을 펴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복수초



그들은 연가리골을 잠시 빌려쓰고 떠났을 뿐이다.


본래의 주인에게 잘 쓰고 고스란히 돌려 준 것이다.


사람도 자연도 모두가 우리 땅을 지켜 온 진정한 주인들 인것이다.

<강원도 인제 연가리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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