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칼럼

[주간조선] 이야기가 있는 소읍(小邑) 기행 19] 경남 거창

눌산 2018. 3. 9.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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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땅에서 봄 볕을 맞다 / 경남 거창

입춘과 우수가 지나도록 꼼짝 않던 동장군의 기세가 경칩을 앞두고 한풀 꺾였다. “하이고 말도 마이소 징글징글합니더.” 경남 거창군 북상면의 산촌에서 만난 노인은 지난 겨울 추위에 고생깨나 했던 모양이다. 어디 산촌뿐이랴. 길고도 지루한 추운 겨울이었다. 새해 첫 절기인 입춘이 겨울 속에서 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면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우수(雨水)부터는 추위가 누그러진다고 볼 수 있다. 경칩에 이르면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새싹이 움을 틔우기 시작한다. ‘비로소 봄의 시작’이라는 경칩을 며칠 앞두고 경남 거창을 찾았다. 긴 추위의 끝자락 바람은 여전히 차가워 봄기운을 논하기에는 이르지만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서서히 봄이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수승대 입구 호음산(930m) 아래 황산마을. 전통 한옥마을로 거창 신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경남의 최서북단에 위치한 거창군은 덕유산과 지리산, 가야산국립공원 일대 해발 1000m급 산군(山群)으로 둘러싸인 해발 200m 내외의 분지에 산악지형이다. 과거 국도보다 못했던 편도 1차선의 88고속도로가 지나고는 있었지만 교통이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러던 곳이 88고속도로가 2년 전 ‘광주대구고속도로’란 새로운 이름의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확 달라졌다. 대구와 광주가 1시간대 거리로 좁혀졌고 전북 무주와는 37번 국도로, 경북 김천·함양과는 3번 국도로도 연결된다. 내륙 한가운데이지만 교통의 요충지인 셈이다.
   
거창을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에게 거창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이미 알려진 거창연극제, 덕유산, 수승대... 보통은 이 정도일 게다. 하지만 읍내 길거리 곳곳에서 만나는 거창거창이란 글을 보게 된다면 단박에 거창을 달리 보게 되지 않을까. ‘거창거창은 본래 뜻과는 무관하게 연상되는 거창(巨創)하다
는 형용사를 조합한 중의적 의미의 거창군 통합 브랜드 네임이다.

 이 지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실제 거창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거창의 특성도 잘 알 수 있다. ‘살 거(居)’에 ‘창성할 창(昌)’, 즉 살기 좋은 고장이란 의미다. 크게 일어날 밝은 곳, 매우 넓은 들, 넓은 벌판, 즉 넓고 큰 밝은 들이란 뜻에서 거열(居烈), 거타(居陀), 아림(娥林)이란 옛 지명도 있다. 모두가 ‘크고 넓은 들판’이란 의미다. 전체 면적 중에 산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적 큰 산악 지역이지만, 거창나들목을 빠져나오면 곧바로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큰 들판’이라는 의미의 ‘한들’이라는 거창평야다. 한자화된 현재의 지명 역시 대평리(大平里)에서 유래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거창은 땅이 기름지다’라고 기록했다. 종합해 보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살 만한 농토를 가진 땅이라는 얘기다. 예부터 거창은 풍족한 땅이었다.

 

▲ 거창 읍내를 가로지르는 위천의 징검다리.

 

▲ 거창 전통시장. 1968년부터 상설시장과 5일장이 공존해온 서부경남 군 단위 최대 전통시장이다.

 

▲ 거창전통시장에서 만난 돼지머리 모형. 요즘도 고사용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광주대구고속도로 거창나들목을 빠져나와 위천(渭川)을 건넜다. 거창읍을 가로지르는 위천 북쪽에 주거지역과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그동안 소읍기행을 하면서 만난 읍 단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거창군 전체 인구 6만여명 중 4만여명이 거창읍에 거주한다. 중심도로는 군청 앞 중앙로. 거창로터리 일대가 가장 번화한 거리다. 먼저 남쪽으로 한 블록 뒤에 자리한 거창전통시장으로 향한다. 그 고장의 속살을 만나기 위해서는 시장통만 한 게 없다. 동서로 이어진 ‘시장길’은 일제강점기 본정통이라 불리던 거창의 명동 골목이다. 중앙로가 현대적인 분위기의 상권이라면 시장길은 전통시장을 비롯한 묵은 상권이다. 길이는 500m. 몇 해 전 원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시장골목을 제외한 440m 구간에 ‘창조거리’란 이름을 붙이고 골목 주요 골격은 그대로 놔둔 채 간판을 새로 정비했다. 전주를 뽑아내고 얽히고설킨 전깃줄도 모두 지중화했다. 거리가 눈에 띄게 말끔해졌다.
   
 한때 시끌벅적하던 골목은 어떨까. 골목에서 구두수선점을 하고 있는 서평진(81)씨는 이렇게 푸념했다. “사람이 찾아와야지. 거리만 정비한다고 되나. 다 쓸데없는 짓이야.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늙잖아. 이 골목도 늙었을 뿐이지. 있는 그대로 봐주면 좀 안 되나.”
   
 서씨는 오히려 재생사업 이전의 거리 모습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서씨는 이 골목에서만 60년째다. 20년은 구두를 만들었고, 40년은 구두 수선을 하고 있다. 한 평 남짓 되는 수선가게는 그의 손때 묻은 수선 도구들로 가득하다. 구두 수선이 주업이다 보니 크고 작은 못 종류가 많다. “이건 30년, 저건 40년….” 손에 잡기도 힘들 만큼 작은 못 하나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쌓아뒀다. 여전히 그의 수선 솜씨를 인정하는 수십 년 단골들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오후 3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울리자 두말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노인정 가는 시간이야. 단골들도 다 알아. 내가 3시까지만 가게에 있다는 걸.” 역시 수십 년은 됐을 법한 자전거를 타고 총총히 사라진다.

 

시장통에서 40년째 구두수선을 하고 있는 서평진(81)씨의 한 평 남짓 되는 수선가게는 그의 손때 묻은 수선 도구들로 가득하다.

 

▲ 일제강점기 본정통이라 불리던 거창의 명동 골목. 몇 해 전 원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시장골목을 제외한 440m 구간에 ‘창조거리’란 이름을 붙였다.

 

사람의 향기 나는 오래된 골목
   
 과거의 명동거리는 상권이 중앙로로 이동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시장통 끄트머리 골목에는 이제 오래된 상점들의 단골 정도만이 찾는다. 하지만 골목의 터줏대감들은 여전히 상점 문을 열고 있다. 낡은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상점이라면 십중팔구 이 골목의 터줏대감일 터. 양복점 앞에 세워진 자전거의 주인 역시 43년째 이 골목을 지키고 있는 이길춘(67)씨다.
   
“우리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문을 열었어요. 올해 마흔둘이니까 43년째네요. 요새 누가 양복을 맞춰 입나요? 사입는 게 더 싼데….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단골 고객이 있어요. 꼭 맞춤 양복만 입는 고객들이죠.”
   
‘WORLD BEST VIP 두루막 전문 승리양복점’이라 걸린 간판은 지난 43년 동안 딱 한 번 바뀌었다. 그 밖의 나머지 모습은 43년 전 그대로다. “그 당시에는 최신식 인테리어였지요. 통유리 진열장에 양복이 걸려 있는 모습만으로도 가게가 빛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문 하나도 안 건드리고 그대로예요. 손 좀 보려고 해도 어디 한두 군데 고쳐 갖고는 안 되잖아요. 나이도 있으니 그냥저냥 하는 거죠.” 이씨는 두툼한 수첩 몇 권을 꺼내 놓는다. “이게 내 전 재산입니다. 그동안 우리집을 드나들었던 손님 명단하고 거창 군내 처녀총각 연락처들이죠.” 알고 보니 이길춘씨는 읍내에서 소문난 중매쟁이였다.
   
“옛날에는 집안에 혼사가 있으면 한복도 맞춰 입었지만 가장 기본은 양복 아닙니까. 신랑부터 부모님까지 한 벌씩은 다 맞춰 입었어요. 함께 온 동네 사람이나 인척들이 우리 아들, 우리 딸 중매 좀 서 보라는 얘기에 하나둘씩 다리를 놓은 게 100쌍이 넘어요.”
   
중매하면 양복 한 벌은 얻어 입던 시절인데, 양복쟁이 이씨는 뭘 받았을까. “양복쟁이가 양복 얻어 입겠어요, 양복값 하라고 봉투는 받았지.(웃음)”
   
500m 정도의 오래된 골목은 이제는 그저 ‘시장통’으로 통하지만 거창의 명동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지 싶다. 보통 40~50년 된 상점이 여전히 건재하니 말이다. 터줏대감들은 이렇게 말했다. “손님을 기다렸다면 진작에 문 닫았다”고. 그들은 이 골목이 생활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고 했다. 삼오슈퍼, 윤패션, 맴시의상실, 너뿐이향, 옥이수선집, 서울신발, 송월타올, 지존당구장, 오빠상회 등 듣기만 해도 정겨운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뭐 특별히 살 것은 없어도 그냥 들어가 구경 한번 해보고 싶은 맘이다.
   
낡은 재봉틀이 진열된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동계올림픽 중계에 푹 빠진 주인은 손님인 줄 알고 벌떡 일어선다. “33년째 재봉틀 판매를 하고 있지만, 요즘은 주로 판매보다는 수리가 주업이죠. 홈쇼핑이나 인터넷 주문으로 다 사버리니까 새 제품은 거의 안 나가요. 대신 수리로 먹고산답니다. 가끔 찾는 사람들이 있어 오래된 중고 재봉틀도 취급하고요.” 그러고 보니 골동품점에서나 볼 수 있는 낡은 재봉틀들이 눈에 띈다. 80년 된 재봉틀도 있다고 한다. 골동품 같지만 여전히 쌩쌩하게 잘 돌아간다.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이라 고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거창의 명물이된 86년식 픽업트럭의 주인 동아철공소 공창석(80)씨는 14살부터 철공소 일을 시작해 66년째 기계 만지는 일을 하고 있다.

 

낯선 여행자의 발걸음 소리에 놀란 견공이 멈추더니 눈싸움을 걸어온다. “이 골목의 주인은 나야!” 결국 견공에게 길을 양보하고 되돌아 나왔다.


   
‘시장길’의 절반은 전통시장 골목이다. 식료품과 채소, 과일, 옷가게가 터를 잡은 한편에 철공소가 있다. 이곳의 터줏대감 공창석(80)씨는 14살 때부터 철공소 일을 시작했다. 그가 66년째 기계를 만지고 있는 가게는 ‘동아철공소’다. 이곳에는 방송에도 두어 번 나오면서 거창의 명물이 된 포니2 픽업트럭이 세워져 있다. 1986년식, 서른두 살 먹은 픽업트럭은 지금도 잘 굴러간다.
   
“옛날보다는 조심해서 타지. 부속 구하기가 힘들어서 고장 나면 애를 먹거든. 단종 직전 마지막 연식이라 부품이 끊긴 지도 20년이야. 고물상이고 폐차장이고 할 것 없이 포니 부품이 있다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구해 오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 이젠 불안해서 가까운 거리에 납품 갈 때나 잠시 타는 정도야. 1톤 새 트럭하고 바꾸자는 사람도 있었는데 절대 안 바꿔. 철공소에서 쓰기에는 크기가 딱 좋아. 적재함 높이가 높으면 짐 싣기가 힘들어. 그래서 저 차까지 포니만 세 대를 탔어.”
   
공창석 대표에게 픽업트럭은 단순히 자동차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 66년 사업의 동반자요, 애증의 산물인 셈. 운전석에서만이라도 잠시 앉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혹여 부서질까 문 한 번 열어보지 못했다. 아쉬움보다는 부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구수한 국밥 냄새에 이끌려 전통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입구부터 국밥집이 주욱 늘어서 있다. 순대와 족발 골목도 있다. 선술집에서는 대낮부터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온다. 그냥 지나치면 섭섭할 것 같아 피순대 한 접시 먹고 나왔다. 사방으로 드나들 수 있는 탁 트인 구조의 시장으로 규모가 꽤나 크다. 인근 합천, 함양, 산청 등지의 장꾼들이 몰려들었던 거창장은 과거부터 전국에서 손꼽히는 규모였다 한다. 1968년부터는 상설시장과 5일장이 공존하며 서부경남 군 단위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의 명맥을 잇고 있다.
   
‘시장길’과 ‘시장1길’이 만나는 사거리에는 문화거리센터가 있다. 원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신축된 건물로 이 골목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센터 맞은편 골목에는 거창 근대의료시설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 ‘자생의원’(1954년 건축)이 있다. 서울대 의대 1회 졸업생인 고(故) 성수현 원장이 50년 넘게 운영한 병원으로 고인의 가족이 거창군에 기부하면서 근대의료박물관으로 증개축해 문을 열고 있다. 박물관은 옛 자생의원 터에 4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의원동, 병원동, 주택동이 하나의 지붕으로 지어져 있는 게 특징. 광복 이후 건립된 지방의료시설로, 의료·건축사적 보존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직사각형 모양의 남북 강변로와 중앙로, 동서 거창대로와 아림로 안에 시장길과 시장 1·2·3길이 있다. 거창읍 원도심 주요 골목이다. 천천히 걷고 적당히 쉬면서 반나절 정도 걸었다. 남들은 쇠락이니 어쩌니 한다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인정하지 않는 듯했다. 골목은 평온했다. 하루 얼마를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두 무탈하게 하루가 지나길 원하는 듯하다. 해가 지면 문을 닫고 해가 뜨면 문을 열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과거의 명동, 현재의 시장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거창읍 남쪽 위천 건너 장정리에는 등록문화재인 최남식 가옥이 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 지붕의 경사를 매우 급하게 만든 독특한 형태로 1947년에 네덜란드의 전원주택을 모델로 지었다고 한다. 최남식 선생은 일제 말기부터 농민운동을 벌여온 인물. 박물관 건립 운동을 벌인 그는 군 단위 최초로 1988년 거창박물관을 열고 개인 수집 문화재들을 기증했다.
   
거창읍의 가장 핫(Hot)한 골목은 위천변에 있다. 강릉 커피거리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로 읍 단위 시골에 커피집만 수십 개에 이른다. 대도시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실내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집도 있고, 커피 맛으로 승부하는 집, 작고 아담한 분위기의 집, 웬만한 프랜차이즈 카페까지 다 들어서 있다. 이게 뭔일인가 싶을 정도로 많다. 심지어 뒷골목 주택가까지 크고작은 커피집이 들어서 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거창 사람들이 이렇게 커피를 좋아한다는 얘긴지. 궁금했다. 배가 부를 만큼 커피를 여러 잔 마시면서까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카페를 드나들었지만 적당한 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수승대 관광안내소에서 만난 거창군 문화관광해설사인 양기인(57)씨를 만나면서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다.
   
“거창은 예로부터 풍요로운 땅입니다. 웬만한 부자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그렇다고 재물이 많은 부자 동네는 아닌 것 같고,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오는 느긋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거창은 교육도시입니다. 경제적인 여유 이상의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다 보니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죠. 교육 다음은 문화겠죠. 굳이 욕심 부리지 않고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즐기는 문화가 생긴 것이죠.”
   
이미 읍내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유독 친절함을 느꼈고, 한갓진 한낮 카페 풍경도 보았다. ‘풍요로움이 있기에 욕심이 없고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거창의 면모는 이쯤으로 정리가 된다. “은퇴 후 거창에서의 삶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고 해요. 실제로 귀촌 인구도 많고요. 저 역시 함양이 고향인데 거창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로 대학을 간 이후 40여년 만에 다시 거창으로 돌아온 경우입니다.” 양기인 해설사 얘기처럼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정원이 있는 전원주택을 쉽게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자연재해가 없기로 소문난 것도 거창이 은퇴 후 주거지로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대과댁 담장은 꽃담이다. 과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멋을 표현했다.

 

위천면소재지에서 만난 상점 간판. 산촌 사람들의 낭만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한옥 정취 물씬 황산마을 고샅
   
거창 읍내를 5분만 벗어나도 산과 들이 펼쳐진다. 읍내와 점점 멀어질수록 산은 높아지고, 내는 깊어진다. 순식간에 평야지대에서 협착한 골짜기로 스며든다. 위천을 거슬러오르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승지 수승대에 이른다. 덕유산에서 흘러온 물과 집채만 한 너럭바위, 노송이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 그러니까 함양의 화림동·용추계곡의 심진동과 더불어 안의삼동(安義三洞)으로 알려진 원학동(猿鶴洞) 계곡에 있다.
   
수승대 입구 호음산(930m) 아래 거창 신씨 집성촌이자 전통 한옥마을인 황산마을이 고풍스러운 풍경을 자아낸다. 눈여겨볼 것은 마을을 꽉 채운 고가(古家)와 고가(古家)를 잇는 고샅의 돌담이다. 등록문화재 제259호로 지정된 황산마을 담장은 토석담. 담장 아랫부분은 건성건성 쌓은 듯 크기가 일정치 않은 돌을 쌓고 윗부분은 흙과 돌로 채웠다. ‘건성쌓기’ 또는 ‘메쌓기’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숨구멍으로 빗물이 잘 빠지게 하고 흙이 씻겨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대단히 과학적인 기법으로 조상들의 지혜라 할 수 있겠다. 대과댁 담장은 꽃담이다. 과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멋을 표현했다. 이런 전통 토석담이 있는 마을은 우리나라에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토석담 중에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심지어 콘크리트에 황토색을 입힌 무늬만 전통담장이라는 곳들이 많은데 이곳은 제대로다.
   
황산마을 한옥은 개울 따라 촘촘히 들어서 있다. 담장 끝에 고가가 있고, 거기서부터 다시 담장이 실타래처럼 이어진다. 담장과 한옥 처마가 어깨를 서로 맞대고 있다. 대문에는 국장댁·교감댁·조합장댁·학자댁·대과댁 등 집주인의 전직을 짐작게 하는 당호가 집집마다 걸려 있다. 이런 집들은 대부분 민박을 친다. 마을 북쪽 언덕이나 동쪽 정자에 올라서면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호수 간판을 단 600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역사다.

 

여행 Tip
   
거창의 먹을거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전통시장의 피순대와 국밥, 족발 등이 여전히 인기다. 커피, 빵, 일식 등 새로운 음식문화도 자리 잡았다.
   
거창읍 강양4길 10번지에 있는 ‘벽담’은 카레와 면, 덮밥 등 일본 가정식 전문점이다. 중앙로의 ‘실로암’은 이탈리아 전통 화덕피자집으로 무슨무슨 기념일이면 꼭 이 집을 가야 한다는 거창의 명물이다. 공수들4길 ‘이동준수제베이커리’는 카페를 겸한 빵집으로 100% 무염버터를 사용한 건강한 빵으로 유명하다고. 거창 읍내에서 5분 거리인 마리면소재지에는 낡은 술도가를 개조해 만든 카페 ‘외갓집’이 있다. 입구부터 술도가 분위기가 풍겨 나온다. 세월의 흔적인 너덜너덜한 콘크리트 벽도 그대로 놔둔 채 카페를 꾸몄다. 거창군 문화관광 http://www.geochang.go.kr/tour 수승대 관광안내소(황산마을 한옥 민박 문의) 055-940-3926

 

[·]  눌산 여행작가

 

주간조선 [2497] 2018. 03. 05 발행

 --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49710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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