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늙은 절', 완주 화암사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화암사가 그러하다. 어지간한 지도에는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밝히기를 꺼리는, 그래서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다. 십여 년 전쯤에 우연히 누군가 내게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화암사 한번 가보라고. 숨어 있는 절이라고. 가보면 틀림없이 반하게 될 것이라고. (안도현 시인)
시인 안도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화암사는 ‘잘 늙은 절’이다. 시인은 ‘화암사 내사랑’과 ‘화암사, 깨끗한 개 두 마리’라는 시와 ‘잘 늙은 절, 화암사’란 수필도 썼다. 화암사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한다. “화암사를 알게 된 것도 실은 그의 시 때문이었다.”라고.
화암사 가는 길은 특별하다. 국도를 벗어나서 화암사 들머리까지 가는 동안 겨우 차 한 대 정도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농로가 이어진다. 주차장에서 절집까지는 약 700미터.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보통은 그 두 배의 시간이 걸린다. 계곡을 가운데 두고 시작하는 산책로와 본래 있던 진입로 모두 빠르게 지나치기에는 아까울 만큼 예쁜 길이다. 숲과 계곡을 가로지르며 오르다보면 마지막 철제 계단을 고비로 화암사에 당도한다. 계단 아래로는 2단 폭포가 시원스럽게 흐른다.
가픈 숨을 몰아쉬며 올라온 계단 위로 우화루가 턱하니 나타난다. 우화루 옆 작은 대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가면 맞은편에 극락전이 있고, 좌우에는 적묵당과 불명당이 자리 잡고 있다. 단청은 퇴색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 같다. 이처럼 화암사는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그래서 더 좋다.
국보인 극락전은 처마를 더 길게 빼내는 하앙식(下昻式) 공법을 적용한 국내 유일의 건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