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좋아 산에사네>
필자가 사는 산촌의 뒷산에는 여전히 잔설이 남아 있다. 여기저기에서 꽃소식이 전해져 오고는 있지만 산촌에서는 딴 나라 얘기다. 산아래 동네에 비해 한 달은 더 있어야 봄기운이 돌 정도로 늦다. 성질 급한 이라면 조바심이 날 만도 하겠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봄기운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대개는 4월까지 눈이 쌓여 있어 산촌의 봄은 멀고도 험하다. 그런 이유로 이즈음만 되면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나가라는 얘기다. 자연스레 문밖을 나선다. 어디를 갈까 단 1초도 고민할 이유가 없다. 긴 겨울의 끝자락에 갈 곳이라고는 남도땅 말고 또 어디가 있겠는가.
보리밭 사잇길에서 남도의 이른 봄을 만나다
이 코너의 이름이 ‘산이좋아 산에사네’다. 골 깊은 산촌에 정착한 이들을 만나러 가야 하는 게 독자들에 대한 도리겠지만, 봄맞이 기념으로 봄볕이 따사로운 남도 땅 장흥으로 향했다. 장흥 행에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마실장’이라는 이름으로 귀농 귀촌한 이들이 모여 장을 연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실장을 보기 위해 여유 있게 일정을 짰다. 취재를 핑계 삼아 하루 먼저 출발해 남도의 이른 봄마중이나 해보자는 생각에서다.
순천에서 2번 국도를 탔다. 고속도로가 목포까지 시원스럽게 뚫렸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지만, 봄마중 나온 여행자에게는 한시가 급한 게 아니라 눈에 담을 풍경 하나가 더 그리운 법이다. 남는 건 시간 밖에 없으니 굳이 고속도로를 탈 이유가 없다. 국도도 빠르다는 생각에 좁고 굽은 시골길로 들어선다. 고질병인 안구건조증이 순식간에 사라질 만큼 시원한 보리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때마침 해질 무렵이라 붉은 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는 보리밭은 긴 시간 달려 온 수고에 대한 대가보다 훨씬 더 과분했다. 봄을 시샘하는 매서운 갯바람이 몰아쳤지만 청보리밭 한가운데로 들어서니 언제 추웠냐는 듯 몸은 더 가벼워진다. 멀리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뜨거운 보리애국 생각이 간절하다. 어린 시절의 추억뿐만이 아니라 아스라이 잊혀 가는 젊은 날의 청춘이 스쳐 지나간다.
노력도에서 근사한 해넘이까지 만나고 장흥 읍내로 향했다. 장흥에 갈 때마다 늘 머무는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고 읍내를 한 바퀴 돌아보다 편안한 분위기의 카페에 들어섰다. ‘지구별 여행, 여행카페’. 간판만으로도 끌리는 분위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연히 들어간 카페의 주인은 내일 열리는 ‘마실장’에 대추차를 팔러 나간단다. 카페 주인 이은주 씨 역시 장흥으로 귀촌해서 ‘마실장’을 이끌어가는 일원의 한 사람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여행자의 감각으로 찾아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내일 취재에 앞서 장흥살이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은주 씨는 13년 전 환경운동을 하는 남편을 따라 장흥에 정착했다. 그동안에는 장흥 청소년수련관에서 일하다 카페문을 연 지는 1년 정도 되었다. 여행카페라는 간판을 건 이유는 장흥을 찾는 여행자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고 싶어서였다.
“장흥의 명소에 관한 자료는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장흥의 문화나 골목길은 장흥에 사는 사람만이 알 수 있잖아요. 혼자 보고 느끼기에는 너무 아까운 풍경들이 많아 그것을 알겨주고 싶었어요. 지금 준비 중에 있는데, 손수 지도를 그려 여행자들에게 나눠 주고 13년 동안 장흥살이를 하면서 느끼고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과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 생각이에요.”
유명 관광지에 식상한 이들이라면 귀가 솔깃한 이야기다. 조만간 장흥의 또다른 명소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매달 1일과 6일, 주말이 겹치는 날에 장이 서는 ‘마실장’
‘장흥 마실장’은 장흥군 용산면 접정리에 있는 장터에서 열린다. 1일과 6일장인 용산 오일장이 있지만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상인 한 두 명만이 자리를 지키는, 있으나 마나하는 장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3년 전 ‘마실장’이 열리면서 다시 분위기가 살아났다.
‘마실장’은 장흥으로 귀농 귀촌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난 2013년 4월 시작되었다. 첫 장터는 장흥읍 덕제리 송산마을 문충선 씨의 카페 ‘오래된 숲’ 앞마당이었다. 장흥마을신문 '마실가자’의 편집인인 문 씨는 귀향 후 지역문화운동을 하고 있었다. 신문 창간 작업을 하던 중 편집위원인 1대 마실장지기 김승남 씨의 제안으로 장이 열리게 된다. 장 이름 역시 특별한 고민 없이 ‘마실가자’의 ‘마실’을 따서 ‘마실장’이 되었다. 시작은 장터의 역할보다는 귀농 귀촌인들의 모임 형식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문화장터’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 뿐만이 아니라 귀농 귀촌인들이 손수 농사지은 농산물과 수제품 등을 판매 · 교환하면서 대안적 장터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장흥 마실장’은 용산 장날인 매달 1일과 6일, 주말이 겹치는 날에 열린다. 오전 9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약 3시간 동안 열리는 장터에는 지역 주민들 뿐만이 아니라 멀리 광주나 순천에서 장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고 한다. 장터를 지키는 사람들 역시 장흥 외에도 인근 해남과 보성, 화순 등지에 귀농 귀촌한 이들이 함께 한다. 마실장을 벤치마킹한 강진의 ‘정거장’, 해남의 ‘모실장’, 보성의 ‘녹색살림장’, 고흥의 ‘미치고 환장’ 등과도 교류한다.
9시 반이 되자 삼삼오오 모여든 이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좌판을 펼친다. 여느 시골장에서는 볼 수 없는 귀농 귀촌인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과 2차 가공한 농산물 위주다. 돈가스와 모시부꾸미, 도자기, 봄동, 직접 재배한 콩으로 만든 두부, 따뜻하게 달인 대추차와 더치커피도 판다. 마실장에서는 판매 뿐만이 아니라 필요하면 물물교환도 가능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여느 장터와 다를 바 없지만 상인들의 표정은 더 밝고 화기애애하다. 모두가 가족 같은 분위기로 지역 장터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12시 반이 되자 하나 둘 들고 나온 짐을 싸고 정리를 한다. 그리고는 너나없이 도시락을 꺼내고 한쪽에서는 구수한 배추된장국이 끓여 진다. 장이 끝나면 이렇게 모두 모여 점심을 먹는다. 필자 역시 된장국에 만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장터가 아니라 친구들끼리 소풍 나온 분위기다. 아마도 이런 온정 넘치는 분위기가 3년 동안 마실 장을 이끌어 온 힘이 아닐까.
2대 마실지기를 맡고 있는 김혜련 씨에게 장터 상인들이 가족 같다고 하자, 마실장 식구들 자랑을 한다.
“늘 이래요. 만나면 무슨 얘기들이 그리 많은지 금방 일어서질 못해요. 우린 상인이 아니라 식구잖아요. 밥을 같이 먹는. 하하”
김혜련 마실장지기 역시 7년 전 귀농했다. 논농사만 3천여 평에 밭농사까지 지으면서 저녁에는 요가를 가르치며 바쁘게 살아가지만 마실장이 서는 날이면 마실장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어김없이 장터로 나온다.
통계청과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도시를 떠나 농어촌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인구가 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한 귀농 귀촌을 꿈꾸는 중장년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들의 공통된 목표는 좀 더 여유로운 삶일 게다. 공감대가 형성되면 이렇듯 하나의 공동체가 탄생한다. 공통된 관심사와 정보를 나누고, 교류하며 꿈꾸던 ‘여유로운 삶’을 ‘마실장’에서 보았다. 잠시지만 그들과 한나절을 보내면서, 그들의 분신과도 같은 농산물과 수공예품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글, 사진> 여행작가 눌산 최상석 (http://www.nulsan.net)
한국 산지보전협회 격월간 산사랑 2016년 3+4월호 (http://kfca.re.kr/sanFile/web7/sub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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