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이면, 족하다!
/ 경남 산청 한고리샘 김정구 씨
산촌의 봄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 비바람이 여름 장마처럼 몰아쳤다. 그렇지 않아도 성급하게 다가왔던 봄이 순식간에 떠나버렸다. 예년에 비해 유달리 풍성했던 벚꽃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꽃잎을 떨구었고, 연둣빛은 더 짙어져 초록으로 치닫는다. 더 남쪽 자락 지리산은 어떠할까. 산 깊은 골짜기가 줄지어 선 지리산의 관문인 단성 땅에 들어서자 멀리 지리산의 영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7~8부 능선을 기준으로 띠를 두른 듯, 봄과 여름 사이의 산색(山色)이 뚜렷하다.
지리산이 그냥 좋다!
소위 지리산 마니아라고 하는 이들을 수없이 만나봤다. 도대체 왜 지리산인가라는 질문도 던져봤다.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대답을 해왔다.
“그냥 좋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의 한고리샘 골짜기에서 만난 김정구(44) 씨 역시 30여 년 간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품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리산 마니아다.
“지리산이 왜 좋냐고요? 지리산은 참 편해요. 완만하면서 급하지가 않지요. 그리고 산에 들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요. 꼭꼭 숨어 있는 느낌이랄까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공간 같은 느낌이죠.”
고등학교 2학년 때 매형과 함께 한 지리산 종주산행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걸었던 그 길이, 어린 나이였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혼자서 지리산을 다시 찾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꼭 혼자서 다시 지리산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화개 의신마을로 하산한 그는 목이 말라 물이라도 한잔 얻어 마시려고 들어갔는데, 집의 주인은 어린 학생이 힘들어 보였는지 물 대신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낯선 방문객에게도 스스럼없이 호의를 베푸는 지리산의 정서가 김정구 씨에게는 낯설면서도 고마웠다. 그 집주인과 인연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내려와 지리산을 배웠다. 지리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지리산의 자연을 공부했다.
“아이스크림 하나였지만, 그것이 저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사람과 사람의 정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산에 살면 좋겠다. 그때부터 막연히 지리산과 산생활을 동경하게 됐죠.”
토목과 조경전문가인 김정구 씨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을 빼고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지리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처음은 혼자였지만 지리산 마니아들이 모인 산악회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산(山)친구들과 함께 했다. 그와 친구들의 목적지는 늘 지리산이었다. 산행과 비박 등 지리산의 자연과 가장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들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한 주만 지리산을 못 가도 병이 날 정도였거든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지리산에서 사는 꿈을 꾸게 되었어요. 그 후 저는 지리산에서의 삶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죠.”
그런가보다. 좋으면 가까이서 보고 싶고, 안고 싶고, 늘 곁에 두고 싶은 마음 같이 말이다.
서울에서 강원도로 발령을 받고 난 후부터 김정구 씨는 우연히 알게 된 산악인 길춘일 씨가 운영하는 백두대간 구간 종주팀의 가이드 활동을 하게 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2주에 한번 구간별 산행 안내를 하면서 그는 백두대간 일시종주까지 하게 된다. 결국 산은 그를 산으로 불러들였다. 회사를 사직하고 난 후 인천에서 잠시 개인사업을 하다 4년 전에는 엄천강변에 자리한 펜션을 친구와 함께 운영하게 된다. 이미 마음은 지리산에 내려와 있은 지 오래됐지만, 나머지 절반인 몸도 그의 오랜 꿈이었던 지리산에 들어왔다.
“저처럼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에 정착한 사람들과 교류가 많았어요. 함께 산행을 하고,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면서 산(山)생활에 대한 매력과 자신감을 얻게 됐죠. 그 중 한 분이 지금 한고리샘 대표를 맡고 있는 정재성 선배에요. 정 선배는 지리산에 내려온 지 19년째인데, 처음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살면서 형수님을 위해 혼자서 집을 지은 분이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만 평이 넘는 이 골짜기를 혼자서 개발하고 있는 대단한 선배에요.”
예비 귀농·귀촌인들을 위한 공간 운영이 목표
김정구 씨가 정착한 골짜기가 한고리샘이다.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는 마르지 않는 샘’이란 뜻이다. 오랜 산(山 )선배인 정재성 씨와 뜻을 함께 하는 선후배들이 모여 들었다. 그리고 귀농·귀촌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전건축학교’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렸다. 지금은 시작 단계지만, 이들은 거창한 계획도 세웠다. 흙이나 나무를 소재로 한 집짓기뿐만이 아니라, 귀농·귀촌인들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인 살면서 부딪치는 실전에 관련된 필요한 땅구입부터 집을 짓고 관리하는 법, 주민들과의 관계 형성, 각종 도구 사용법 등을 가르칠 예정이다. 이미 강의실이나 기타 기반시설은 준비가 끝났지만, 숙소로 사용될 공간이 5월말에 완공될 예정이라 정재성 대표와 김정구 씨가 직접 공사를 하고 있다.
“집을 지어주는 곳은 많잖아요. 하지만 소소한 부분까지 알려주진 않거든요. 귀농·귀촌인들 또한 집만 있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 살다보면 사소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엔진톱 하나만 고장이 나도 그걸 고치기 위해 한참을 나가야 하거든요. 가르치는 학교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교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공간을 꾸밀 예정입니다.”
건축학교 외에도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와 지리산 마니아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할 계획이다. 이 모든 것을 정재성 대표와 김정구 씨, 그리고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선후배들이 함께 한다. 모두가 지리산에 푹 빠진 사람들이다.
지리산 주민이 된 지 불과 4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동안 지리산을 오른 횟수로 치자면 현지 주민보다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은 주민의 입장이 아닌 외지인의 입장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고 살아온 셈이다. 그렇다면 30년 동안 지리산만 바라보고 살다 지리산 주민이 된 지금의 심정은 어떤지 궁금했다.
“대부분의 서울 친구들은 부러워해요. 또 힘들게 왜 그런 산골에 들어가 사냐는 친구도 있고요. 그렇지만 저는 200% 만족합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꿈꾸던 삶이니까요. 가끔 주변에 전원생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왔다 다시 돌아가는 경우를 보면 가슴이 아프죠. 시골생활은 끝없는 노동의 연속이거든요. 일을 즐겨야 하는데 일이 힘들어지면 떠날 수밖에 없는 거죠. 일은 힘들지만, 대신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잖아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김정구 씨는 산책을 하자고 했다. 한고리샘 골짜기를 빙 둘러 한 바퀴 도는 코스다. 요즘은 매일이 노동의 연속이지만, 하루에 한번은 꼭 산책을 한다고 한다. 요즘 제 철 맞은 고사리나 두릅도 뜯으며 마음의 여유를 느껴보자는 의미에서다. 그의 걸음걸이에서 산사람의 여유가 느껴진다.
<글, 사진> 여행작가 눌산 (http://www.nulsan.net)
한국 산지보전협회 격월간 산사랑 2016년 5+6월호 (http://kfca.re.kr/sanFile/web8/sub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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