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너머 새해 희망을 찾아
▲망해사 뒤편 전망대에서 바라 본 만경평야.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붉은 노을을 기다렸지만, 날씨가 흐려 결국 만나지 못했다.
새해가 되면 꿈, 각오, 목표, 바람 등을 다짐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런 의미에서 ‘어디에서 새해를 맞이하는가’는 중요하다. 필자는 그동안 바다는 번잡하고 어수선하다는 생각에 주로 산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2018 무술년(戊戌年) 새해맞이 장소를 고민하다 산도 바다도 아닌 곳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지평선 뷰(view)가 펼쳐지는 곳,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 서서 한없이 이어지는 땅의 끝을 향해 달렸다. 묵은 해와 새해의 경계를 넘어서는 곳, 그곳은 전북 김제 만경평야다. 광활한 평야지대인 만경읍과 금산사를 품은 금산면을 다녀왔다.
▲70~80척의 배가 드나들었다는 새창이 다리 아래 신창 포구. 새만금 물막이 공사 이후 어획량 감소로 현재는 4척만 남았다.
만(萬) 개의 이랑(頃)을 가진 광활한 땅, 만경읍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하늘과 땅이 맞닿은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익히 알려진 김제 지평선축제가 그곳에서 열린다. 김제는 북쪽의 만경강과 남서쪽의 동진강 사이 금만(김제만경의 줄임말)평야, 즉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품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이다. 이 일대를 ‘징게 맹게 외배미들(김제 만경 너른 들)’이라고 부른다. ‘징게 맹게’는 전라도 사투리로 김제와 만경, ‘외배미들’은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로 탁 트인 땅을 의미한다.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들어 가는 곳을 막은 새만금방조제 역시 만경과 김제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붙인 이름이다. 전북 완주군 원정산에서 발원하여 서해 새만금으로 흘러가는, 길이 약 80㎞의 만경강은 이 일대 곡창지대를 적시는 젖줄이다. 대부분 직선화된 제방은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위한 일제의 흔적들이다.
만경(萬頃). 밭 사이의 경계(두둑)가 만 개란다. 즉 ‘만 개의 이랑’이란 뜻.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바로 김제 만경평야다. 직접 보지 않고는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가 보라. 얼마나 넓은지 광활(廣闊)이라는 지명도 있다. 김제시 광활면이다. 이 일대 만경읍과 광활면, 죽산면에 가면 마치 몽골의 대평원이 떠오른다. 광활면은 우리나라에서 산이 없는 유일한 면(面)이기도 하다. 논둑길만 장장 15㎞에 이르는 곳도 있다. 직선거리로 따지면 서울시청에서 과천까지의 거리다. 갯벌이었던 곳이 1925년 대규모의 간척공사로 인해 태어난 것이다.
목적지는 김제시 만경읍. 거주인구가 채 3000명이 안 된다. 우리나라 읍 단위 중 인구가 가장 적은 곳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소읍이다. 지방도 712호선이 남북으로, 702호선이 동서로 읍내를 지난다. 반경 500m 내외 거리, 딱 그 자리에만 상가와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허허벌판 한가운데 섬 같다. 대부분 구릉지와 평야지대로 이루어진 만경읍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라는 동산의 높이가 해발 60m, 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장등산은 해발 42.4m다.
▲가업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 만경제재소 유성기 대표가 교육생들이 만들 목공 재료를 준비하고 있다.
▲2대 65년째 운영 중인 만경제재소는 지역 문화 공간이자 사랑방이다. 매주 목공을 배우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인다.
만경읍의 중심은 만경리다. 읍사무소 뒤편 동산에 오르면 만경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직선에 가까운 두내산로(路) 좌우로 낡은 점포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과거 만경읍의 중심도로였던 이곳은 현재 쇠락의 끝자락에 서 있다.
“뭐, 있것소.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요.”
사람들 소리에 이끌려 찾아 들어간 만경제재소 유성기(54) 대표 얘기다. 유 대표 말 한마디에 할 말을 잃고 화목난롯가에 모여 앉은 사람들 틈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종일 만경리 일대를 걸었지만 사람을 만날 수 없었던 차에 제재소에 모인 사람들이 반가웠다. 그들은 만경에서 학교를 다녔던 이들로, 잘나갔던 시절의 만경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50대 초·중반의 선후배들이었다. 만경읍 취재를 한다는 얘기에 일행 중 한 명인 김영주(55)씨는 “만경은 근동에서도 부자동네로 소문난 지역입니다. 보시다시피 땅이 넓잖아요. 옛날에는 삼시세끼만 먹어도 부자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요즘엔 농토는 여기 있어도 집은 전주나 익산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직장처럼 출퇴근 농사를 짓는 셈이죠. 또 인구유입 자체가 안 되다 보니 거주인구는 자꾸 줄어 상권이 다 죽은 거지요”라며 나고 자란 고향이 자칫 소멸될지도 모른다며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나저나 한낮에 제재소로 사람들이 모인 까닭이 궁금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모여 목공체험을 합니다. 도마도 만들고, 차탁도 만들죠. 정기적으로 지역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목공 교육도 하고 있답니다”라는 유 대표 얘기에 난롯가에 모인 일행들이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민을 나누고, 외지에 사는 사람들까지 불러 모아 만경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이따금 제재소 음악회도 열고요.” 귀퉁이에 놓인 그랜드피아노를 보고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그 용도였다. 만경제재소 유 대표의 아내 김진희씨는 익산 원광대에서 강의를 하는 성악가다. 제재소와 그랜드피아노, 성악이라…, 낯선 조합이다. 김진희 교수는 “지역 문화공간이 없다 보니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없어요. 남편의 목공과 저의 음악을 조합해 이런 공간을 만들었더니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이죠”라고 했다.
만경제재소 유성기 대표는 부친에 이어 2대 65년째 운영하고 있다. 부친이 갑자기 작고하면서 20대에 제재소를 물려받았다. 제재소 대표로, 한옥 짓는 목수로, 생활목공을 가르치는 강사로 살아오면서 지역 문화공간의 필요성을 간절히 느끼게 되었고, 하나둘 그의 꿈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만경리 골목 풍경. 한때는 뭇 사내들이 무시로 들락거렸을 다방문은 굳게 닫혀 있다.
다시, 제재소 밖 두내산로에 섰다. 고요하다. 인적은 드물고 상가의 흔적들만 남은 빈 점포만이 즐비하다. 이 골목은 2010년 인기리에 방송됐던 드라마 ‘자이언트’의 촬영지였다. 만경제재소 역시 드라마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했었고 골목 상인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70년대 도시의 태동기를 배경으로 했던 드라마의 촬영지로는 이곳이 적격이었던 것이다.
북쪽 동산을 바라보고 걸었다. 그중 눈에 띄는 가게가 있다. 간판이 ‘사거리 생선집’이다. 3대째 문을 열고 있다는 이 집은 지금은 뒷골목에 위치하고 있지만 외곽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가장 번화한 사거리의 중심 상점이었다. 702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지평선로를 건너면 우체국과 파출소, 읍사무소가 모여 있다. 그 옆으로 보이는 고색창연한 붉은 적벽돌 건물은 만경여고 기숙사로 쓰이던 곳으로 현재는 비어 있다.
자동차로 10분 거리인 만경강으로 향한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마지막 지점에 일제강점기에 놓인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 다리인 만경대교가 있다. 현재는 바로 옆으로 새 만경대교가 놓였고,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는 만경대교와 29번 국도가 지나는 청하대교까지 놓여 총 네 개의 다리가 나란히 만경강에 걸쳐 있다. 신창진(新滄津)으로 불렸던 이곳은 군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김제와 만경평야에서 나는 쌀을 수송할 목적으로 만든 나루였던 것을 물동량이 많아지자 1933년에 시멘트 다리를 건설한 것이다. 지역명을 따 ‘새창이다리’라 불렸는데, 지금도 지역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새창이다리’로 통한다. 현재는 노후화로 인해 차량 통행은 금지다. 평소에는 망둥어와 숭어 낚시꾼 수백 명이 낚싯대를 드리운 진풍경을 볼 수 있다지만, 현재는 아쉽게도 조류인플루엔자(AI) 방역으로 출입이 통제돼 있다.
좀더 가까이 보기 위해 다리 아래 강가로 내려섰다. 포구에는 고깃배 서너 척이 정박해 있다. 그물을 손질하던 부부가 말했다. “많을 땐 신창포구에 배가 새카맣게 떠 있었어요. 70~80척이 드나들었으니까요. 지금요? 여기 보이는 4척이 전부랍니다. 새만금방조제가 생긴 후부터 고기가 안 잡혀요.” 모두가 잘살게 될 줄 알았던 새만금 물막이가 결국은 어업을 생계로 하는 신창포구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된 셈이다.
해 떨어지기 직전 심포항으로 달렸다. 심포항과 바로 옆 망해사는 일몰 명소로 널리 알려진 곳.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카메라를 손에 들고 기다렸지만, 붉은 바다는 볼 수 없었다. 대신 광활한 만경평야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새해, 새 소망과 함께.
▲아흔아홉 굽이라는 능제저수지 주위로 산책로가 나 있어 고요한 분위기를 즐기며 걷기에 좋다.
여행 Tip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 나들목에서 만경읍 만경리까지는 10여분 거리다. 만경에서 하루를 보내기에는 시간이 남을 만큼 좁은 동네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 다리가 있는 신창포구와 일몰이 아름다운 심포항, 망해사가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다. 그래도 시간의 여유가 남는다면, 군산까지 들러 볼 수 있다.
일반인에게도 문이 열려 있는 만경제재소에 들러 유성기 대표의 목공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좋겠고, 65년 된 제재소 구석구석에 쌓인 나무 냄새에 취해 보는 것도 좋겠다.
김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벽골제와 함께 만경리에 능제저수지가 있다. 아흔아홉 굽이라는 저수지 주위로 산책로가 나 있어 고요한 분위기를 즐기며 걷기에 좋다.
▲양귀자 소설 ‘숨은 꽃’의 배경이 된 믿음으로 귀의한다는 의미의 귀신사(歸信寺)에서 내려다 본 마을 풍경이 아름답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종교 순례지, 김제 금산면(金山面)
전북 김제시 금산면은 평야지대인 김제 땅에서는 산악 지역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모악산이 품은 천년고찰 금산사 때문일 게다. 금산면은 몰라도 금산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금산사는 알아도 금산면 소재지인 원평리를 여행 목적으로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소문난 순대국밥을 먹기 위해 잠시 들르는 정도랄까. 전주에서 모악산을 왼편에 두고 고개를 넘었다. 금방 금산면 땅에 들어선다. 금산사 앞에 이르자 음식점과 찻집이 즐비하다. 금산사 얘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금산면 소재지인 원평으로 먼저 간다.
원평터미널에서 원평교를 지나 성암사거리까지 약 800여m에 이르는 원평로(路)가 금산면 소재지 원평리의 중심도로다. 여전히 약국과 여관, 식당, 마트, 이발소, 미장원, 세탁소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점포들이 몰려 있지만, 1번 국도가 지나던 시절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융성했던 도로다. 1번 국도가 소재지를 우회하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하지만 여타 면소재지 상권에 비해서는 나은 것이라고. 그것은 과거 1번 국도 시절부터 소문난 음식점들 때문으로 보인다. 원평순대 하면 근동에서는 알아준다. 지금도 이 순대국밥을 찾아 원평을 찾는 이들이 많다. 또한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백반과 중국 음식 등 예전부터 서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점들이 여전히 성업 중이다. 가까운 김제나 전주 사람들이 주 고객이지만, 금산사를 중심으로 천주교와 기독교, 불교, 증산도 등 40여종의 종교 성지를 품고 있어 끊임없이 찾아오는 순례자들 덕분에 원평 상권이 유지되는 비결이라 볼 수 있다. 취재를 위해 간 날에도 순대국밥집과 중국 음식점은 드나드는 손님들이 가득했다.
▲원평장터에서 서울주단 간판을 걸고 43년째 한복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복녀(83) 씨. 장터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원평장터의 산증인이다.
▲밥과 술을 내주던 장터 한가운데 주막. 한때는 장꾼들의 아지트 쯤 되었을 분위기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요즘도 어김없이 닷새마다 장이 선다는 원평장터로 향했다. 급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는 어르신, 장터가 있는 유목정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오동례(79)씨다. “장날도 아닌디 뭐허게 왔소”라며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필자에게 “볼 것도 없을 텐디” 하신다. 겨울에는 매일 경로당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점심을 드신다는 소리에 함께 경로당을 찾았다. 안에서는 대여섯 명의 할머니들이 점심 준비를 하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기다렸다 한술 뜨고 가라고 했지만, 장터 입구에서 봐뒀던 팥죽집을 갈 생각이라 아쉽지만 사양하고 경로당을 나왔다. 밥 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인다.
좁은 골목을 지나자 근래 보기 드문 녹이 슨 양철지붕을 인 장터 건물이 나타난다. 장날은 아니지만 상시 문을 연다는 한복집, 양복점, 튀밥집, 닭집, 신발가게, 팥죽집, 그릇가게 등이 문을 열고 있다. 그중 장터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한복집을 찾았다. 페인트로 쓴 상호 옆에 새로 단 아크릴 간판이 걸린 ‘서울주단’이다. 장터 취재를 하고 있다는 말에 “어찌 알고 오셨소. 우리 집이 그래도 이 동네서 젤로 오래되긴 했지요”라며 43년째 한복을 짓고 있다는 김복녀(83)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지금은 장터가 다 쪼그라들어서 요모양이지만 옛날에는 국시장사, 밥장사, 술장사가 즐비했지요. 여그가 옛날부터 떡골목으로 통해요. 떡장수들이 쭉 자리 잡고 앉아 있던 골목 아니요. 지금은 길이 넓지만 옛날에는 좁은 골목이라 사람들 어깨가 부딪쳐서 걸어다니기도 힘들었어요. 그러던 것이 요새는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답니다.”
그랬다. 토요일 한낮 장터는 고요했다. 두어 시간 장터에 머물렀지만, 한복가게로 들어가는 손님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으니까. 다시 김복녀씨 얘기가 이어진다. “애들 아부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남의 집에 세를 내고 6년을 했어요. 옛날에는 쌀계라고 있었는데, 외상으로 이 건물을 사서 들어왔지요. 나중에 계를 타서 다 갚고도 아들 하나 딸 하나 다 대학 보내고 먹고살았답니다. 그때는 얼마나 장사가 잘됐던지 바느질로 밤을 새는 날도 허다했으니까.”
장사가 잘됐다면 얼마나 잘됐을까. 시집·장가를 가면 으레 한복을 맞췄다. 양가 부모님을 비롯해서 일가친척들까지 말이다. 이불도 몇 채씩 해 갔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싶다. 결혼뿐만 아니라 수의도 한복집에서 맞췄고 여름이면 모시옷을 주문해 입었던 시절도 있었다. “길거리에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다 내가 지은 모시옷을 입고 다녔어요.” 여든이 넘은 연세에 여전히 돋보기 없이도 바느질을 한다는 김복녀씨는 간간이 잊지 않고 찾아오는 옛날 단골 손님들 때문에 문을 못 닫는다고 했다.
▲원평장터의 22년 된 ‘시장팥죽(063-543-0326)’ 에서 제대로 된 팥칼국수 맛을 보았다. 직접 삶았다는 팥국물 맛이 진하면서도 깔끔했다. 가격은 5천원.
원평장터는 1919년 3월 20일 지역 농민들의 주도로 장날 오후를 기해 장꾼들과 함께 김제지역 최초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3·1만세 함성이 울려 퍼진 곳이다. 또한 광복군 이종희 장군과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의 활동 근거지이기도 하다. 장터 동쪽 끝 유목정에 3·1만세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기념비 바로 앞에는 광복군으로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던 이종희 장군 생가가 있다. 원평터미널 뒤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설치된 원평집강소가 있다. 전라도 53개 군·현에 세운 자치행정기구로 현재 원평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백정 출신 동록개가 동학의 원평대접주 김덕명에게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헌납했다고 전해진다. 원평집강소는 전시·공연 등 지역 문화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금산면 모악산 일대는 불교(금산사), 천주교(수류성당), 개신교(금산교회), 원불교(원평교당), 증산교(증산법종교)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교 성지다. 금산면 화율리에 있는 수류성당은 완주 되재, 익산 나바위 성당과 함께 1890년대 호남지역에 있던 3개 성당 중 하나로 동양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건축 당시에는 48칸 규모였지만 한국전쟁 당시 전소돼 전쟁이 끝난 1959년에 다시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금산리에 있는 금산교회는 ‘ㄱ’ 자 구조의 한옥교회로 남녀의 예배공간이 분리된 것이 특징. 1908년에 건축됐으니 110년 역사를 자랑한다.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불전인 국보 62호 미륵전이 있는 금산사는 서기 600년(백제 법왕2)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주차장에서 절집으로 향하는 고즈넉한 숲길이 아름답다. 독특한 절 이름에 이끌려 찾아간 귀신사는 양귀자 소설 ‘숨은 꽃’의 배경이 된 곳이다. 믿음으로 귀의한다는 의미의 귀신사(歸信寺)는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비구니 사찰이다. 절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풍경이 평화롭다.
모악산 자락에는 귀신사~금산사~금산교회~증산법종교~대순진리회당~원불교원평교당~수류성당을 잇는 40㎞에 이르는 ‘모악산 종교순례길’이 조성되어 있어 이 길을 걷는 순례자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걷기길은 이 외에도 금산사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모악산마실길’ 김제구간 2코스가 있다. 금산사 주차장~백운동마을~귀신사~싸리재~금평저수지~금산사 주차장까지 13.3㎞로 소요시간은 3시간30분이다.
▲금산면 화율리에 있는 수류성당은 완주 되재, 익산 나바위 성당과 함께 1890년대 호남지역에 있던 3개 성당 중 하나로 동양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행 Tip
전주 한옥마을을 기준해서 금산면 소재지 원평리까지는 자동차로 30분 거리다. 전주와 원평리를 잇는 코스로 여행 일정을 짜면 하루 코스로 적당하다.
4일과 9일 장인 원평 오일장은 규모는 축소되었어도 장날이면 어김없이 장이 선다. 우연히 찾아간 원평장터의 22년 된 ‘시장팥죽’(063-543-0326)에서 제대로 된 팥칼국수 맛을 보았다. 직접 삶았다는 팥국물 맛이 진하면서도 깔끔했다. 가격은 5000원. 원평순대는 순대의 대명사가 될 만큼 꽤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경기도 등 전국에서 여기 원평이란 지명을 상호 앞에 붙인 순대국밥집이 더러 있다. ‘시골집’과 ‘시골장터’에서 원평 피순대국밥 맛을 볼 수 있다.
[글·사진] 눌산 여행작가
주간조선 [2490호] 2018. 01. 08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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