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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칼럼

[주간조선] 이야기가 있는 소읍(小邑) 기행 15 / 전남 장흥, 충남 장항

by 눌산 2017.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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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 늦추고 구불구불 골목을 걷고 싶다면…

 

장흥서초등학교 앞에서 40년 동안 문방구를 하다 학생수 감소로 영업이 어려워 전업했다는 충성슈퍼·분식.

 

 

인간 내비게이션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웬만한 국도나 지방도 정도는 다 꿰고 있어 붙여진 별명이라 길을 묻거나 지역 정보나 맛집에 대한 문의를 해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내비게이션 폐인이 되어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우회도로가 뚫리고 고속도로가 새로 생겨나다 보니 눈 감고도 훤히 그려졌던 전국의 도로가 이제는 길치 수준까지 이른 것. 결국, 취재를 위해 전남 장흥과 충남 장항의 길을 오가는 동안 서운하게도 길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 빠른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때문이다. 덕분에 삶의 속도 또한 최고속도 110㎞에 맞춰져 버린 느낌이다. 그래도 소읍에 들어서면 발걸음이 느긋해진다. 그래야 보이기 때문이다.

 

갈대와 억새가 뒤섞인 탐진강, 댐으로 막히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사람·맛·흥·정이 넘치는 고장, 장흥
   
   느지막이 장흥에 도착했다. 장흥읍 송산마을의 100년 된 한옥 민박 ‘오래된 숲’으로 들어서자 고택이 주는 근엄한 자태가 몸가짐을 다소곳하게 만든다. 본채에 여장을 풀었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가 하룻밤 묵기에는 과분한 공간이다. 자리를 깔고 누웠다. 얼마 만인가. 이런 호사, 이런 느낌이.
   
   닭울음 소리에 평소보다 이른 잠을 깼다. 천천히 마을 안 고샅을 걸었다. 검은 이끼 머금은 돌담이 정겹다. 마을을 벗어나자 탐진강이 흐른다. 그 옆으로 지인이 꼭 걸어 보라고 추천해준 솔둑길이 이어진다. 특이하게도 소나무 가로수길이다. 길고 곧게 뻗은 소나무가 제각각의 모양을 뽐낸다. 낮은 콘크리트 다리인 잠수교를 건너면 순지마을이다. 마을 주민 김종렬(63)씨는 “강변에 돌이 겁나게 많았어요. 지금은 갈대가 다 덮어버렸지만, 옛날에는 모래, 자갈, 돌밭이었지요. 다 탐진강댐이 생기면서 물이 마르니까 생겨난 현상일 거요”라며 어릴 적 강변에서 물놀이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학교 끝나면 소를 몰고 강으로 달려갔어요. 소꼴도 먹이고, 친구들끼리 놀기도 했지요.” 지금은 물이 탁해 물놀이도 못 한다고 했다. 흐르는 물을 막아서 생긴 현상이다.
   
   송산마을에서 강을 건너 순지마을을 지나 읍내까지는 걸어서 30여분 거리. 탐진강을 기준으로 동쪽이 구읍(舊邑)이다. 장흥을 한 방에 세상에 알린 토요시장이 동쪽에 있다. 주요 관공서와 공설운동장, 문화예술회관, 향교 등이 동동리, 남동리, 남외리, 교촌리, 충렬리 일대 구읍에 몰려 있다.
   
   장흥 토요시장은 ‘장흥삼합’의 탄생지다. 장흥 특산물인 한우와 키조개, 표고버섯을 함께 구워 먹는 삼합구이로 먼저 정육점에서 한우를 구입한 뒤 식당에서 구워 먹는 방식이다. 토요시장의 꽃은 단연 ‘장흥 어머니’들이다. ‘어머니의 텃밭장터’란 이름으로 65세 이상 장흥에 거주하며 직접 재배한 작물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한 70여명의 어르신들이 매주 토요일 장터에 나온다. “대덕면 촌구석에서 읍내로 시집와 좋아했는데 시집이 친정보다 더 많은 농사를 짓더라”는 임옥단(78)씨는 장터는 당신의 놀이터라고 했다.
   
   점심때가 되자 도시락을 펼쳐 놓고 한바탕 잔치가 벌어진다. 여기저기에서 “이것 좀 먹어 봐” 하며 서로의 음식을 나눈다. 나그네에게도 막걸리 한 사발을 권하며, 이미 고추장을 찍은 더덕을 안주로 내어 주고 있다. 

    “자응(장흥)은 유독 다무락(돌담) 골목이 많아요. 자응에 왔으면 가장 자응스러운 풍경을 만나 봐야지 않것소?”라며 지인은 몇 군데 마을을 추천했다. 우선 장흥읍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칠거리에서 장흥경찰서 방향에 있는 동동리 성안길이다. 강 건너 상가 지역과는 정반대 풍경으로 ‘촘촘계단’으로 불리는 좁은 계단을 오르면 오래된 골목을 만날 수 있다. 다음은 장흥문화예술회관을 지나 교촌리와 충렬리 일대 풍경이다. 충렬리에는 천도교당이 있고, 교촌리에는 향교가 있는데 이 둘이 하나의 골목으로 이어진다. 수령 300년 된 팽나무 보호수가 있는 향교 앞에서 좁은 골목을 힘겹게 나무 리어카를 끌고 오르고 있는 박두연(73)씨를 만났다. 사진을 찍다 발견한 낡은 리어카 두 대 때문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 어르신이 사용하던 것으로 낡아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자 세워둔 것이라고. “지금 쓰고 있는 것도 한 10년 됐는갑소. 저 두 대는 한 30년 썼고. 이것도 인자는 저 자리에 세워둬야 할란갑서. 자꼬 고장이 나서 속을 썩이네.” 박두연씨는 팽나무 앞에 필자를 서 보라고 하더니, “여기가 좀 특이한 동네요. 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남외리하고 충렬리, 교촌리가 다 붙어 있당께”라며 손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킨다. 이 팽나무삼거리가 세 마을의 경계인 셈이다.   
   남산 아래 구읍 주변에는 예스러운 골목이 많다. 적당히 경사진 산자락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집과 집 사이에 좁은 골목이 한없이 이어진다. 언덕 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영회당(永懷堂)은 동학농민운동의 최후 격전지로 정읍 황토현 전적지와 공주 우금치 전적지, 그리고 장성 황룡 전적지와 더불어 동학농민운동의 4대 전적지로 꼽히는 석대뜰전투에서 전사한 관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 장흥 읍내와 탐진강의 경치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장터에서 먹거리가 빠질 수 없다. 장흥삼합, 국밥, 곰탕, 보리밥, 팥죽 정도가 장흥 장터의 별미다. 그중 보리밥집을 찾았다. 5000원짜리 보리밥을 시켰는데, 반찬 가짓수가 무려 17가지다. 광주에서 왔다는 옆자리 부부는 가끔 토요시장을 찾는다고 한다. “이 집 보리밥 생각이 나서 토요일이면 일부러 찾아옵니다. 즉석에서 무친 나물과 조미료가 안 들어간 밑반찬이 맛있거든요.” 부부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이 집 팥죽도 먹어 보길 권했다. 걸쭉한 팥국물이 진해서 좋다고.

▲ 장흥 토요시장에는 ‘어머니의 텃밭장터’가 열린다.

▲ 시장 안 연지보리밥은 푸짐한 상차림에 놀라고, 저렴한 가격에 두 번 놀라는 집이다

   교촌리와 충렬리, 남외리 앞 넓은 들을 석대뜰이라 한다. 관군과 동학혁명군의 큰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 세 마을 주민들은 매년 추석 무렵이면 ‘석대골목축제’를 연다. 마을 화합을 다지는 의미로 외지로 나간 주민과 지역 주민의 한바탕 잔치다. 행정상의 마을명은 각기 다르지만, 하나의 골목으로 이어진 한 마을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에서 축제란 이름을 걸기 전부터 이어져온 행사다.
   
   탐진강을 건넜다. 번화한 거리를 만난다. 웬만한 지역에는 다 있는 프랜차이즈점도 보인다. 그중 유독 눈이 가는 간판 하나. 빛바랜 간판에 국번 없이 전화번호 5105만이 선명한 문화당 서점이다. 사업자등록상의 개점 시기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이다. 영업은 그전부터 했다고 하니, 알려진 역사만 해도 무려 70여년에 이른다. 고모와 부친에 이어 현재는 며느리 박미정(56)씨가 3대째 운영하고 있다. “말해 뭐하겠어요. 대형서점도 다 무너지는데. 책으로 길게 번성하는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저희 아버님 소망이셨어요. 문을 닫을 수 없는 이유랍니다.”
   
   전국이 단풍 열풍으로 시끌벅적하지만 장흥의 가을은 늦다. 읍내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평화마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에도 아직 색의 변화는 없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연못 주변을 빙 둘러 감싼 배롱나무 군락지가 있다. 꽃 피는 계절이라면 여정의 방점을 찍어도 무방할 풍경이 펼쳐진다. 이 계절에 찾아도 나쁘지 않다. 빼곡히 들어찬 배롱나무에 가을물이 들어 연못 위로 둥둥 떠 있을 터이니.

 

늦은밤 장흥에 도착해 찾아간 한옥 민박 오래된 숲의 밤 풍경. 대청마루에 앉으면, 고요한 시골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 빛바랜 간판에 국번 없이 전화번호 5105만이 선명한 문화당. 사업자등록상의 개점 시기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7월로 장흥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다.

 

여행 Tip
   
   토요시장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파이토랩(010-5764-0883)은 슬로푸드를 지향하는 유기농 채소 요리 전문점이다. 햇볕에 말린 현미로 무쇠솥에 갓 지은 밥과 말린 가지와 호박, 건고추를 넣고 달달 볶은 건강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나홀로 여행자를 위한 게스트룸도 운영한다. 시장 안 연지보리밥(061-863-8635)은 푸짐한 상차림에 놀라고, 저렴한 가격에 두 번 놀라는 집이다. 장흥 읍내에서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송산마을에 가면 100년 된 한옥 민박 ‘오래된 숲’(010-8986-2727)이 있다.
   
   장흥 읍내기행은 토요시장에 주차를 하고 동동리와 남외리, 교촌리, 충렬리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코스를 짜면 걸어서 한나절 정도 걸린다. 문화당 서점은 칠거리 다리 건너에 있다.

 

 

 

서정적 풍경의 포구와 영화로운 시절의 흔적들, 장항
   
   “장항과 군산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을 타면서 이 두 도시에 사는 연인들은 서로 이별하기가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15분인 편도 뱃길을 바래다주고 헤어지기 싫어서 다시 돌아오는 배를 함께 타고, 막상 한쪽의 도착지에 이르면 또다시 헤어지기 싫어 맞은편의 항구로 함께 가고….” 곽재구 시인은 자신의 책 ‘포구기행’에서 장항을 ‘헤어지기 싫은 연인들의 항구’라고 했다. 만난 지 한 3일쯤 된 연인들의 사랑놀이에 비유한 장항은 군산항과 마주한 충남 서천군에 속한 소읍(小邑)이다. 책에서 카페거리로 소개한 금강하구둑에서 장항읍으로 향하는 도로변의 수많은 카페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 금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과 마주한 장항포구, 올 연말이면 두 도시를 잇는 군장대교가 개통된다.

 

 

▲ 문화예술창작공간이 된 미곡창고 앞에서 주말이면 다양한 공연을 한다.

 

 

장항과 군산을 오가던 배가 드나들었던 도선장. 배의 운행 중단과 함께 한갓진 포구가 되었다.


   
   장항 하면 제련소와 장항선이 먼저 떠오른다. 장항은 장항선의 종점역이었다. 천안에서 아산·예산·홍성·보령을 지나 서천군 장항읍에 이르는 노선이었으나 현재의 장항선은 익산역까지 연장 운영된다. 장항역 또한 서천군 마서면으로 역사(驛舍)를 이전했다. 노선명은 그대로 장항선이지만 장항읍을 전혀 거치지 않고 금강하구둑을 건너 곧바로 군산으로 이어진다.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장항선은 서해안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군산 사람들은 배를 타고 장항으로 건너와 서울행 기차를 탔다. 장항역은 열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였다. 그러다 금강하구둑이 건설되고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장항의 운명은 갈라졌다.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은 게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것.
   
   “구 장항역 앞에 승무원 숙소가 따로 있었어요. 열차를 타고 내리는 승객들도 많았지만, 역무원과 승무원들로 역 주변은 늘 북적거렸죠.” 장항역에서만 10년을 근무했다는 정성민 장항역장 얘기다. 장항역이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장항 읍내에 있던 구 장항역은 화물전용역으로 바뀌었다.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읍내로 향한다.
   
   “아침 시간이면 20~30분 단위로 배가 오갔지요. 학교 가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출근하는 직장인에 서울 가는 사람들까지 선창에는 배를 타기 위해 줄지어 선 사람들로 가득했어요.”
   
   장항과 군산을 오가는 배가 드나들었던 도선장 앞에서 친정어머니에 이어 30년째 경남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원순(65)씨 얘기다. 도선 매표소를 겸했던 바다 쪽 식당 외벽에는 ‘유람선, 도선 매표소’라는 글자가 뚜렷이 남아 있다. 그녀의 딸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군산으로 학교를 다녔다. 배를 좀 더 편하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의미에서 선미에는 여학생이, 후미에는 남학생이 타던 그 시절 군산배의 기억이 선명하다.
   
   전북 군산과 충남 장항은 도(道)가 달라 학군 때문에 보통 초등학교 5~6학년 때 군산으로 전학해야 중학교 배정을 받을 수 있었다. 유독 교육열이 높았던 장항 사람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군산까지 통학을 시켰던 것. “있는 집 자식들이나 군산으로 갔지 뭐”라며 옆에서 듣고 있던 어부 박씨가 한마디 거든다. “장항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군산’입니다. 하구둑 생기고 나니까 뱃길이 끊기고, 물 흐름이 바뀌면서 고기도 안 잡히고, 누구 탓할 것은 없지만. 올 연말에 군장대교가 개통된다고 하니 좀 경기가 나아지겠지요.” 
   
   밤새 휘황찬란한 조명이 빛을 발하는 군산과 달리 장항 포구는 저녁 8시만 되면 암흑의 거리로 변한다. 사람도 배도 사라진 풍경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기란 힘들다. 서천호와 군산호 두 대의 배가 번갈아가며 드나들던 도선장은 식당 두 군데만 남고 한적한 포구가 되었다. 바로 옆 물양장에만 이따금 고깃배가 드나들 뿐, 그것도 요즘 한창 많이 잡힌다는 멸칫배가 전부다. 장항에서 제련소 얘기가 빠질 수 없다. 일제강점기 당시 1936년에 세운 높이 100m의 장항제련소 굴뚝이 장항 어디에서도 보인다. 여전히 장항의 상징이지만, 1989년 제련소가 문을 닫은 이후 애처롭게 서 있을 뿐이다.
   
   장항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본거지였다. 장항제련소 굴뚝과 함께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지정을 받은 미곡창고가 있다. 1930년대 일제가 약 172만㎡에 달하는 바다를 매립해 장항항을 만들고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지은 시설이다. 콘크리트 기둥과 목재 트러스 등 독특한 건축기법의 근대 창고 원형이 잘 남아 있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통운 창고로 쓰이다 철공소 간판을 달기도 했지만, 그후 오랜 시간 텅 빈 창고로 방치되던 것을 2012년 공장미술제를 시점으로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현재는 서천군이 문화예술창작공간으로 리모델링하여 인형극단 ‘또봄’이 위탁운영을 맡아 매년 창작 인형극을 제작해 공연하고 있다.
   
   “인형극단 또봄은 서천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공연 단체입니다. 매년 인형극을 비롯하여 다양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는데, 무반응이었던 지역주민들도 이제는 장항의 미래를 위해 이러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답니다. 장항에 산재한 근대문화유산이 현재는 방치된 수준이지만 앞으로는 어떠한 형태로든 활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서천군 문화예술창작공간 이애숙 대표는 단순한 문화예술 공간을 넘어 보물 같은 장항의 근대문화유산을 하나둘 끄집어낼 계획이다.
   
   문화예술창작공간 길 건너에서 빛바랜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영화상회. 주로 선원들과 공장 인부들의 작업복을 주문 제작하던 곳으로 김순화(77)씨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과 함께 40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도로를 넓히면서 가게가 반으로 잘려 나갔어요. 다 좋다고 하는 일이니 나 혼자 반대할 수 없잖아요. 요즘은 손님이 없어요. 예전처럼 고깃배들이 들어오지 않고 군산으로 나가니까요”라며 “어쩌다 한 번이지만 가끔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있어 문을 닫을 수가 없다”고 했다.
   
   창작공간 뒤로는 20여개 음식점이 모인 ‘장항 6080 음식 골목길’이 있다. 본래 있던 음식점들로 아귀의 집산지답게 아귀찜을 비롯해 꽃게, 복어 요릿집 등이 있다. 골목에는 여인숙과 하숙집도 한 군데씩 남아 있는데, 도시가 번성하던 시절에는 여인숙 골목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선박 접안시설인 물양장(物揚場)과 장항역, 제련소가 있는 선창과 지근거리에 있어 골목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장항역과 제련소가 떠난 후 한동안 경기는 침체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를 여행자들이 채우고 있다. 군산이나 서천을 찾은 여행자들이 오랜 시간 지켜온 맛을 보기 위해 골목을 찾는다. 골목 끝에는 구 장항역 시절 역무원과 승무원 숙소였던 자리에 기벌포영화관이 들어서 있고, 장항 전통시장이 철길 건널목 너머에 있다. 가로세로 12블록으로 나뉜 구 도심 골목을 차근차근 걸어 보는 것도 좋겠다. 과거 무슨 용도로 쓰였는지 모를 낡은 건물들이 골목마다 한두 개씩 들어앉아 있다. 구 장항역에서 시작해 전통시장, 문화예술창작공간, 도선장, 물양장까지 돌아보는 데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전혀 영화롭지 못한 거리에서 만난 ‘영화상회’. 40년 동안 선원들과 공장 인부들의 작업복을 주문 제작하던 곳이다.

 

40여 년 선원들의 단골 구멍가게라는 물양장 앞 안동상회

 

여행 Tip
   
   ‘장항 6080 음식 골목길’에 나란히 우리식당(041-957-0465)과 연화식당(041-957-0685)이 있다. 여전히 현지인도 즐겨 찾는 30년 이상 된 아귀찜 전문식당이다. 두툼하게 살이 붙은 아귀를 푸짐하게 담아 내온다.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과 살짝 데친 미나리와 버무려 먹는 맛이 일품. 도선장 앞에서 60년째 문을 열고 있는 경남식당(041-956-1219)의 아귀찜과 대구찜도 포구 사람들에게 단골 메뉴다.
   
   금강하구둑을 사이에 두고 군산과 마주 보고 있는 장항은 아직은 여행자들의 관심 밖에 있다. 하지만 근대건축물의 가치와 한가로운 포구의 풍경 등 장항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면 군산 못지않은 여행지가 될 터.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지인 신성리 갈대밭과 장항 송림해수욕장, 기벌포 해전 전망대가 있는 장항스카이워크가 읍내에서 자동차로 30분 이내 거리에 있어 하루나 이틀 정도 일정의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  눌산 여행작가

 

주간조선 [2481] 2017. 11. 6 발행

 --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48110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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