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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일기

기차길 단상

by 눌산 2008.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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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덕분에. 기차소리는 친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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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이면 기차를 타고 구례구역을 거쳐 쌍계사 벚꽃놀이를 갔습니다. 5월 단오날이면 남원 춘향제를 보러갔고. 엄마 손을 잡고 곡성장, 순천장을 보러 다녔습니다. 곡성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딱 한 달간이었지만 기차 통학도 했습니다.
 
기차길은 산으로 들로 강으로 나가는 지름길이기도 했고. 때론 놀이터가 되고, 학교를 오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면 개구쟁이들은 철로에서 만나 모종의 모의(?)를 하기도 했고. 그렇습니다. 수박이나 닭서리 같은  대형(?) 모의는 주로 기차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따금 지나가는 기차소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거사를 진행하는데 제격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 모의가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수박밭 주인 아들 종아리는 멍자국으로 처참했으니까요. 수박서리를 모의하고 주도한 건 그 주인아들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사에 가담한 아이들 종아리를 때리진 않았습니다.
 
철로 위에서의 놀이는 대부분 아주 위험한 놀이들입니다. 대못을 철로에 올려놓고 기차가 오길 기다립니다. 이쯤 얘기하면 ‘아! 맞아. 그랬지...’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군요. 기차가 지나가면 철로 위에 올려놓은 대못은 납작하게 눌린 채로 튕겨져 나옵니다. 그러면 그 대못을 주워 숫돌에 갈아 날카로운 칼을 만들었습니다. 손잡이는 다 낡은 면 팬티나 메리야스를 찢어 칭칭 감아주면 아이들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의 예쁘장한 칼이 완성됩니다.
 
아! 어린 아이들에게 무슨 칼이냐고요? 강가에 살았던 아이들에게 칼은 필수품이었습니다. 고기를 잡으면 곧바로 강가에서 배를 갈라야 하기 때문이죠. 배를 가른 피라미나 은어 같은 물고기는 버드나무가지에 줄줄이 꿰서 집으로 가져갑니다. 물고기가 흔하던 시절이라. 또 전기가 없어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꼬들꼬들하게 말린 물고기는 조림이나 튀김으로 먹곤 하였으니까요.
 
살다보니. 30년 만에 또다시 기차길 옆에 살고 있습니다. 처음 이곳에 이사올때만해도 기차소리에 꽤나 신경이 쓰이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차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익숙해진 탓이지요. 간간이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화물열차인지 무궁화호인지 새마을호인지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화물열차는 유독 덜컹거리고 무궁화호에 비해 새마을호 열차는 소리가 아주 부드럽습니다. 또 속도가 빠르다 보니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소리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역마을에 살았던 아이들에게 기차소리는 이른 아침 까치의 울음소리와 비슷합니다. 하릴없이 기차역을 서성거렸던 것은 반가운 이가 내릴 것만 같은.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니까요. 명절 전이라면 더욱 그랬습니다. 저에겐 서울로 돈 벌로 떠난 누이도 형도 없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대상이 한두 명은 꼭 있었습니다. 양손에 선물꾸러미를 든 형과 누이를 마중하는 아이들의 입이 찢어질 만큼 크고 환한 미소가 떠오릅니다.

기적소리는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 같습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고.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니까요. 기다림과 보냄이 이어지는 역 마을의 그 아이들 역시. 지금은 모두들 그 기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오늘. 산을 오르다 만난 전라선 무궁화호의 기적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어릴적 나고 자란 그 고향역이 멀지 않은 곳이지만. 저 기차를 타고 고향 가는 길이 아직은. 멀어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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