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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향은 전라남도 곡성 동리산 자락 태안사입니다.
그럼. 중2세요? 아니오! 워낙 귀한(?) 아들이라 부처님 곁에서 태어난 것 뿐입니다.
어릴적부터 절은 절하는 곳이다.라고 배웠습니다. 걷기 시작하면서 부터 108배를 했으니, 절 하나는 똑소리나게 잘 합니다. 지금의 태안사 매표소 앞집이 제 생가입니다. 어머니를 따라 태안사까지 걸어 다녔던 기억이 많습니다. 외할머니 댁이 지금의 태안사 부도탑 옆이라 더불어 무던히도 다녔던 길입니다. 그 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집니다. 먼지 폴폴나는 비포장 길에 사철 마르지 않는 계곡이 옆으로 흐릅니다. 봄이면 얼레지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아주 아름다운 길이지요. 대부분의 절집 가는 길이 포장이 됐다지만 태안사 길은 그대로 남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태안사 전나무와 삼나무 길은 능파각에서 일주문까지 입니다. 전나무하면 월정사나 내소사가 떠오르지만, 이 태안사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고요해서 더 좋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분위기를 숙연케하는 부도밭입니다. 도열한 전나무 뒤로는 대숲입니다.
비신(碑身)이 깨진 채로 귀부(龜趺)와 이수(머릿돌)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이 고려 태조 때 광자대사 윤다(864∼945)의 부도비(보물 제275호)입니다. 태안사를 132칸 규모의 대찰로 중창하고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등을 말사로 거느렸던 것도 바로 이 때였다고 합니다. 태안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파의 중심사찰이었습니다. 쇠락을 거듭해 오늘날에 이르렀지만.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산사의 숲길은 마음을 씻어 주는 길입니다. 절집은 숲길이 끝나는 곳이 있습니다. 태안사는 2km에 이르는 울창한 숲길이 제대로 남아 있는 절집 중 하나입니다. 기생오래비 같은 포장 도로가 아닌, 먼저 폴폴 나는 흙길입니다.
매표소를 지나 조태일 시문학관, 능파각, 일주문에 이르는 이 길에는 모두 네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습니다. 먼저 속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면 돌아오라는 귀래교(歸來橋), 마음부터 씻고 들어오나는 정심교(淨心橋), 세속의 모든 번뇌를 씻고 지혜를 얻어 가라는 반야교(般若橋), 도를 이루기 전엔 속세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해탈교(解脫橋)까지.
모퉁이 한굽이 돌때 마다 몸과 마음은 정화가 됩니다. 걸어서 가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동차로 순식간에 절 마당까지 들어가 버립니다.
대웅전 뒤 늙은 매화나무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는 동안 대웅전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절 마당은 전용 놀이터가 되곤 했습니다. 요즘처럼 절집을 찾는 여행자들이 거의 없던 때였으니까요. 어느날 갑자기 불사를 하고, 그 아름답던 나즈막한 배알문이 거창하게 새로 단장되면서 옛 풍경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다행이도 여름이면 발담그고 놀던 능파각만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이란 긴 이름의 동리산 자락에 구산선문을 일으킨 혜철스님의 부도탑은 대웅전 뒷편 절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심(下心)으로 이끌었던 배알문(拜謁門)입니다. 누구라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낮은 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배알문은 새롭게 단장 된 '신상'입니다. 몇년 전에 보수 공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윗부분을 합판으로 막은 것이 보입니다. 하심으로 이끌었던 낮은 문을 허리 꼿꼿히 세우고 들어갈 만큼 높게 만든 것이죠. 문제가 되었는지, 아니면 아차, 싶었는지 합판을 사용해 높이를 낮춘 것입니다. 기특합니다. 어찌 그런 기막힌 생각을 하게되었는지.... 이런 뜻깊은 소중한 문화유산 복원을 아무 생각없는 사람들에게 맞기진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못 한가운데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태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이름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고, 법당에는 높이 1.4m되는 약사여래철불좌상을 모셨던 듯하다. 고려 고종 10년(1223)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1684)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초에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때 많은 피해를 입어서 지금 있는 건물은 대부분이 복원된 것이다.
경내에는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승무를 출 때 사용하던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 태안사동종(보물 1349호), 태안사일주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태안사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70호) 등이 있다. / 문화재청 자료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고, 법당에는 높이 1.4m되는 약사여래철불좌상을 모셨던 듯하다. 고려 고종 10년(1223)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1684)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초에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때 많은 피해를 입어서 지금 있는 건물은 대부분이 복원된 것이다.
경내에는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승무를 출 때 사용하던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 태안사동종(보물 1349호), 태안사일주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태안사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70호) 등이 있다. / 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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