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지혜로 만든, 물길 바람길 다스리는 ‘비보(裨補)숲’ 이야기
(왕정·서창·길왕·외당·진평·은고마을 마을숲)
완벽한 땅은 없다고 한다. 선조들은 부족하면 보완해서 살기 좋은 터로 가꾸며 살았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지리적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우리 풍토에 맞는 풍수를 발달시켜 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비보(裨補) 풍수’다. ‘비보’란 ‘부족한 지형이나 산세를 보완하는 방법’을 뜻하는 의미로 예를 들면 불의 기운을 막는 목적으로 해태상을 만들거나, 물과 바람, 그리고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언덕을 만들고 마을 입구에 숲을 조성해서 돌탑을 세우기도 했다.
마을숲에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 신앙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숲을 가리키는 명칭도 다양하다. 비보의 의미를 담은 수구막이, 민간 신앙의 의미를 품은 성황림, 당숲, 또는 마을의 중심이자 마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이란 의미의 숲정이, 숲마당 등으로도 불린다. 지역에 따라서는 도탐배기나 도탐거리 같은 비보숲과 연관된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무주에도 이런 풍수를 위한 비보숲, 즉 마을숲이 여럿 존재한다. 취재를 위해 무주의 마을을 다녀 본 결과 오래된 마을에는 으레 숲이 있었다. 그중 무주읍 왕정마을, 적상면 서창마을과 길왕마을, 안성면 외당마을, 설천면 진평마을, 무풍면 은고마을을 취재했다.
무주읍 왕정마을
무주읍 오산리 왕정마을은 남북으로 길게 난 골짜기가 독특하다. 오르막이 없는 평지로 30번 국도가 지나는 오산마을에서 약 2km 가량 깊숙이 들어가 있다. 마을 입구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70여 그루와 10여 그루의 소나무, 그리고 팽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 전형적인 수구막이 숲이다. 왕정마을에서 나고 자란 조명제(65) 씨는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태풍이 지나갈 때면 숲의 진가를 알 수 있다”라고 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숲에서 한번 걸러 주기 때문에 왕정마을은 예부터 태풍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마을숲을 예전에는 도탐배기라고 불렀어요.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도 있었다는 돌탑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는데, 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돌탑은 사라지고 돌탑 위에 있던 장석만 숲에 남아 있답니다.”
왕정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매년 정월 초이튿날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산제를 지내오고 있다. 먼저 마을 뒷산에 있는 산제당에서 제를 올리고,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바위라 불리는 천연기념물 제249호인 구상 화강 편마암이 있는 골짜기에서 두 번째 제를 올린다. 마지막으로는 초사흗날 새벽 1시경에 마을숲에서 마무리한다. 새마을운동 당시 토속신앙을 탄압하면서 산제당이나 돌탑 같은 민간신앙의 상징물이 다 없어졌지만, 왕정마을 산제당은 뒷산 깊숙이 있어 무사했다고 한다.
왕정마을 사람들에게 마을숲은 여전히 풍수 이상의 존재다. 마을 공동 산제가 끝나기 전까지는 산제당이나 마을숲에서 개인의 소원을 빌 수 없다. 산제가 끝나면 비로소 각자 소원을 빌기도 하고 공덕을 드린다. 왕정마을 숲은 자연재해뿐만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안녕을 지키는 소중한 유산이다.
적상면 서창·길왕마을
적상산에 올라 서창마을을 내려다보면 산으로 빙 둘러싸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딱 한군데, 서쪽을 향해 입구가 열려 있다. 서창마을 숲은 이 열린 문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역시 풍수를 보완하기 위한 비보숲이다.
서창마을 주민 김선배 씨는 “저 숲이 없었으면 태풍에 우리 마을 다 날아갈걸!”이라고 했다. 마을숲은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또한 열린 문을 막아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마을을 보호해준다고 믿는다.
서창마을은 적상산성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창고‘란 뜻이다. 오래전 군량미를 보관하던 창(倉)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적상산 반대편에는 북창과 내창이란 지명도 있으니, 그 역사가 오래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숲은 사철 제각각의 매력이 있겠지만, 기자는 이른 봄의 숲을 가장 좋아한다. 4월 말에서 5월 초 연둣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숲의 기운은 청량하다. 수십여 그루의 노거수가 일제히 새잎을 틔우는 순간이야말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다.
서창마을 바로 옆 길왕마을에도 전형적인 수구막이 숲이 있다. 이 숲을 마을 사람들은 ‘팽나무거리’, ‘숲거리’라 불렀다. 수종은 팽나무로, 지금은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많이 잘려 나가고 몇 그루 안 남아 있다.
안성면 외당마을
외당마을 뒷산의 마을숲은 몇 해 전 산림청에서 주관하는 ‘전통마을숲 복원사업’을 통해 산신당을 복원하며 말끔히 정비했다. 오래전부터 마을의 싱징과도 같은 장소로 산신당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 전날 동제를 지냈다.
마을회관 사이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마을에서 바라본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족히 2~300m나 되는 긴 능선 전체가 한 무더기의 숲으로 보인다. 생각보다 넓고 길다. 숲의 수종은 주로 소나무지만 사이사이 참나무가 섞여 있다. 숲 한가운데는 정자도 세워져 있어 쉼터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유독 바람이 심한 주변 환경에 비해 외당마을이 아늑한 느낌이 드는 건 바로 이 숲 때문일 게다. 외당마을 전통마을숲은 여전히 마을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설천면 진평마을
마을 앞을 흐르는 남대천이 마음까지 깨끗하게 한다 하여 붙여진 지명인 청량리(靑凉里) 진평마을의 비보숲은 아름드리 소나무 군락이다. 80여 그루의 소나무가 마을 입구에 도열해 있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오던 곳으로 소나무숲 한쪽 남대천이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어 한여름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된다.
무풍면 은고마을
무풍면에서 거창 고제면으로 넘어가는 1089번 지방도로변에 위치한 은고마을에는 30여 그루의 느티나무가 든든한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도로변에서 마을까지 올라가는 300여 미터의 도로 중간에 있는 숲은 한여름이면 사방 분간을 할 수 없을 만큼 숲이 우거져 마을 주민들의 피서지로 이용된다. 안성면 외당마을과 같이 산림청에서 주관하는 ‘전통마을숲’에 선정됐다.
글·사진 눌산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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