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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이야기

'최고의 피난처 베스트10' 십승지(十勝地) 무풍

by 눌산 2022.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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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유토피아 십승지(十勝地), 무풍! 영화로웠던 시절의 무풍시장과 명례궁

무풍 가는 길이면 기자는 농담 삼아 국경 너머 신라에 간다라고 얘기한다. ‘라제통문(羅濟通門)’을 지나 무풍으로 향하는 길은 왠지 또 다른 세상을 향한 발걸음처럼 느껴지 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뚫린 라제통문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단지 그럴 것이라고 추정만 할 뿐이다.

라제통문(羅濟通門)

최고의 피난처 베스트10에 무풍이

무풍 땅에 들어서면 한국 천하명당 십승지 무풍면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우뚝 서 있다. 십승지(十勝地)란 예로부터 물()과 불()과 난()을 피할 수 있는 우리나라 열 곳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 십승지에 대한 기록이 전해져 온다. 정감록의 은 정씨를, ‘은 천도(天道)와 풍수지리를, ‘은 계시록 같은 예언서를 뜻한다. 십승지란 일종의 피난처요 이상향이다. 고려시대 이래로 외침이 많았던 시대 백성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유행처럼 비결서(秘訣書)가 난무하게 되는데, 바로 정감록을 비롯한 풍수도참서가 그것이다. 그중 현세에까지 명확하게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 정감록의 십승지로, 십승지는 한 마디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검증과정을 거친 최고의 피난처 베스트 10’이라하겠다.

'한국 천하명당 십승지 무풍면' 안내판

그곳에 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현대판 유토피아인 십승지는 어딜까. 먼저 무주군 무풍과 영주시 풍기 금계촌, 예천군 금당실, 봉화군 춘양, 속리산 우복동, 개령의 용궁. 합천군 가야산 만수동, 공주시의 유구·마곡, 남원군 운봉, 부안군 변산, 태백산, 영월군 연하리가 이에 해당된다.

좀 더 들어가 보자면, 십승지에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오지라 할 수 있는 첩첩산중으로 외부로부터의 접근이 어려운 반면, 산 넘고 물 건너 깊숙이 들어간 골짜기지만 적당한 농토가 있다는 점이다. 노루의 목처럼 입구는 좁고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농토가 펼쳐진다. 잠시 머무르는 경우보다는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갈 조건이 충족되는 땅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풍은 대덕산을 진산으로 삼고 주변으로 해발 1천 미터급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천혜의 승지라 할 수 있다.

무풍면 행정복지센터 십승지 표지석

선조들이 선택했던 십승지는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물 좋고 산세 좋은 터는 유명 휴양지가 되었고, 아직 사람 때가 덜 탄 골짜기는 도시민들의 귀농·귀촌 선호지역이 되었다. 선조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십승지에 찾아 들어갔다면, 이 시대 도시민들은 삭막한 콘크리트 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십승지를 찾아간다. 그 의미는 다르나, 생존과 희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십승지는 현대판 유토피아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명례궁을 해체한 자재로 재건한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 한옥

무풍시장과 명례궁터

영화로웠던 시절의 무풍시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안다. 골목마다 술 팔고 밥 파는 식당들이 즐비했고, 장이 서는 날이면 하루 전부터 김천에서 온 소몰이꾼들이 밤새 술 마시고 왁자지껄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남국식당, 대성옥, 신천옥, 거창옥, 부산식당, 금산옥이 저 골목 안에 있었어요. 경북 김천, 경남 거창, 충북 영동의 장꾼들이 다 드나들 정도로 큰 장이었으니까요. 지금은 두 군데뿐이지만 다방도 일곱 개나 됐고, 장날이면 오가는 사람들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사람이 많았어요. 운전기사에 조수, 차장까지 있었던 경상도 충청도로 가는 버스는 늘 만원이어서 차장이 몸으로 밀어서 사람을 태우곤 했던 그 시절 풍경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무풍시장에서 50년 넘게 이발소 문을 열고 있는 육영식 씨의 회고다.

무풍시장 뒤편 명례궁터 표지석

시장 현대화사업으로 대덕산장터라 이름이 바뀌며 과거의 흔적 역시 찾기 힘들어졌다. 오일장은 장꾼 한두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시장이라 부르기에도 옹색할 정도다. 육영식 씨는 반만이라도, 아니 반에 반만이라도 옛날 호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영화롭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무풍시장 뒤편으로 돌아가면 명례궁(明禮宮)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사실 무풍에 궁터가 있다는 사실은 무주사람들도 잘 모른다. 그렇다면 무풍에 궁터는 왜 있을까.

명례궁은 고종 때의 척신(戚臣)으로 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이 고종 27(1890) 당시 무주부사의 협력을 받아 99칸 규모의 건물을 짓고 명성황후에게 상납한다. 명례궁은 구한말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유사시를 대비한 행궁(行宮)이었다. 조정에서 명례궁을 관리하는 관감을 두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관감을 폐지하고 궁에 딸렸던 토지마저 일제의 수탈기구였던 금융조합 소유가 된다. 그 후 행궁은 다른 사람에게 매각되고 해체되어 여기저기로 팔려나가게 된다. 그중 해체된 자재 일부가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의 남평문씨 집안으로 팔려나가 재건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주춧돌 일부는 무풍생활체육공원 옆 공터에 방치돼 있다.

경북 성주와 경남 거창, 삼도의 갈림길 무풍삼거리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명례궁을 한 번도 다녀가지 못했다. 주인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궁은 불행했던 역사 속에서 기둥 하나, 문짝 하나까지 뿔뿔이 흩어졌다. 터만 남아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바람이 있다면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복원이 되었으면 한다. 궁터로 점지된 예사롭지 않은 땅, 무풍에 흔적 하나쯤 남아 있을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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