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무진(無窮無盡)! 무주 한 바퀴-26
덕유산자연휴양림에서 만난 100년 숲, 독일가문비나무와 잣나무숲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맑고 고요했다. 한여름 못지않게 덥고 습했던, 11년 만이라는 때 아닌 초가을 더위도 하루아침에 말끔히 사라졌다. 구천동터널을 벗어나면서 습관처럼 창문을 열었다. 살갗을 간질이는 기분 좋은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한낮인데도 기온은 22도. 딱 좋다. 숲에 들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다.
휴양(休養)을 위한 숲
목적지는 덕유산자연휴양림이다. 여름 성수기를 피해 굳이 이즈음에 휴양림을 찾은 건 다름 아닌 호젓한 숲에서 100년 세월을 오롯이 지켜 온 독일가문비나무를 만나기 위해서다. 가문비나무 앞에 독일이라는 이름은 붙어 있어 원산지가 독일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웬걸? 본래 이름은 노르웨이가문비나무란다. 휴양림에 상주하는 김병전 숲해설사는 “안내판에 쓰여 있는 영어표기가 ‘Norway spruce’다. 즉 노르웨이가문비나무라는 얘기다.”라면서 “본래 이름은 노르웨이가문비나무지만 최초에 독일에서 들어왔다는 이유로 독일가문비나무가 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에 처음 시험 재배를 시작했고, 덕유산자연휴양림에 독일가문비나무 숲이 조성된 것은 1931년 독일에서 들여온 10만여 그루 중 일부가 심어지면서부터다. 원산지와 기온이 비슷한 이곳이 생육에 적합할 것으로 보고 화전민이 살던 터인 지금의 장소에 152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덕유산자연휴양림의 독일가문비나무 숲은 우리나라 최대 군락지로, 생태적 보전 가치와 학술적 연구 가치를 인정받아 산림청이 2000년부터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2010년에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어울림상’을 받을 만큼 귀한 대접도 받고 있다.
소나무과의 상록수인 독일가문비나무는 곧은 원뿔 모양으로 수형이 아름다워서 크리스마스트리로 많이 쓰인다. 독일에서는 전체 산림 면적의 37%를 차지할 정도로 독일을 상징하는 나무다. ‘검은 숲’이란 뜻의 독일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지역의 흑림(黑林)도 바로 이 나무가 주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경수로 심기도 하지만, 수령이 100년에 가까운 군락지는 덕유산자연휴양림이 유일하다고 한다.
덕유산자연휴양림에 152그루가 심어졌다면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갔을까. 나머지 묘목들은 학교 운동장 주변이나 관공서 등 주로 공공기관에 심어졌는데, 우리는 그 나무가 독일가문비나무라는 것을 모른 채 일상에서 흔히 봐 왔던 것이다. 김병전 숲해설사는 자신의 고향인 장수군 장계초등학교에도 현재 여섯 그루의 독일가문비나무가 남아 있다고 했다. 덕유산국립공원의 옛 탐방안내소 주변 가로수 역시 같은 시기에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독일가문비나무다.
독일가문비나무 숲은 휴양림 입구에서 약 600미터 거리에 있다. 김병전 해설사와 함께 숲으로 향했다. 숲을 돌아볼 수 있는 130미터 길이의 산책로는 경사가 완만하고 나무 덱이 놓여 있어 접근이 쉽다. 산책로를 따라 숲으로 들어가면 하늘 높이 곧게 치솟은 독일가문비나무가 늠름하고도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입구에 낙엽송 군락이 있어 나무의 겉모습만으로는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병전 숲해설사의 말 한마디에 낙엽송과 비슷한 종인 구상나무, 가문비나무, 종비나무 등 상록침엽수들을 손쉽게 구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독일가문비나무는 다른 상록침엽수들과 달리 솔방울보다 굵고 길쭉한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다. 원산지가 눈이 많이 내리는 북유럽이다 보니 무거운 눈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는 제법 넓은 공간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서서 하늘 높이 뻗어 있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나뭇가지들이 부딪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보면 잠시나마 자연과 하나가 됨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인지 휴양림에서는 이 공간에서 명상이나 요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한다.
숲에서 가장 큰 나무는 높이가 무려 34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건물로 치자면 11층 높이다. 지름은 85cm, 둘레 267cm로 어른 둘이 손을 맞잡아야 안을 수 있는 크기다. ‘가장 큰 나무’라고 쓰인 표지판이 서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독일가문비나무 군락 사이에 키만 껑충하게 자란 층층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층층나무는 다른 활엽수와 달리 소나무처럼 한 해에 한 마디씩만 자라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이 층층나무를 활엽수의 이단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독일가문비나무 숲 한가운데 자란 층층나무는 곁가지가 들쭉날쭉하다. 키가 큰 독일가문비나무 틈에서 햇빛을 보아야 했기에 부지런히 키만 키운 층층나무가 꿩의 다리처럼 가늘고 길어 애처로워 보인다.
덕유산자연휴양림에는 독일가문비나무 숲 못지않은 잣나무 숲도 있다. 현재 야영장으로 이용되는 잣나무 숲에는 28개의 야영 덱이 설치되어 있다. 서울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는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오는데, 가기 싫어서 뭉그적거리고 있어요”라며 숲을 떠나기 싫은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1시간 내외의 짧은 시간이지만 숲해설사를 통해 독일가문비나무 숲의 가치와 의미를 되돌아보고, 숲의 기운을 듬뿍 받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알고 가면 좋은 TIP]
덕유산자연휴양림에는 숲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다. 한겨울을 제외한 3월부터 11월까지 독일가문비나무 숲길 걷기와 숲속 명상 체험 등을 진행한다. 휴무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사전에 전화로 예약하면 원하는 시간에 숲해설사와 함께 숲길을 걸으며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휴양림 홈페이지 https://www.foresttrip.go.kr 문의 전화 063-322-1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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