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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火)과 물(水)과 난(亂)을 피할 수 있는 곳 '삼둔사가리'
오지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인 '삼둔사가리'라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에 전하는 '삼둔 사가리'는 일곱 군데의 피난지소를 이르는 말입니다. 난을 피하고 화를 면할 수 있는 곳이란 뜻으로, 전하는 말에는 피난굴이 있어 잠시 난을 피했다 정착했다는데서 유래된 곳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피난 굴은 찾을 수 없고 세 곳의 ‘삼(三)둔’과 네 곳의 ‘사(四)가리’만이 남아 있습니다.
삼둔사가리를 칭하는 일곱 군데의 마을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과 홍천군 내면 일대에 걸쳐 있습니다. 점봉산(1,424.2m)과 방태산(1,444m) 일대 가장 깊은 골짜기들로 삼둔은 살둔, 월둔, 달둔이고, 사가리는 아침가리, 연가리, 명지가리, 적가리입니다.
삼둔사가리 중 가장 깊은 골짜기인 연가리골을 다녀왔습니다. 들목인 맞바위에서 진동계곡을 가로질러 원시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몇년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집 드나들듯 이 골짜기를 헤집고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무너진 돌담이 전부였습니다. 자동차 바퀴자국이 난 걸 보니 사람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몇발자국만 들어가도 원시림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연가리골은 이 땅 최고의 원시림지대라는 점봉산과 방태산 언저리에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바로 저 집을 드나드는 자동차 바퀴자국이었습니다. 전기도 전화도 없이 홀로 사는 흙집 한채가 들어 앉아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질 만큼 협소한 골짜기입니다.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고요.
연가리골은 산세가 유독 부드럽습니다. 인접한 아침가리 적가리 명지가리 모두가 걸출한 산봉우리를 머리에 이고 있지만 연가리골의 끝은 백두대간 주능선이 지납니다. 정상은 따로 없지만 해발 1천m를 오르내리는 백두대간 주릉이 휘감고 있어 골이 시작되는 맞바우에서 시작해 끝이 나는 백두대간 주능선상까지 오르막을 느낄 수 없는 완만한 경사의 계곡 길은 쉬엄쉬엄 걷기에 딱 좋지요. 한때는 50여 가구가 오손도손 모여 살았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무너진 돌담만이 그 흔적을 말해줄 뿐입니다.
외딴집 주인은 토종벌을 치나 봅니다. 워낙 깊숙한 골짜기라 농토라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앞산 뒤산에 빨랫줄을 걸어도 될 만큼 좁은 골짜기입니다.
외딴집을 지나면 우렁찬 물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5단폭포에서 들리는 소리입니다. 이 폭포의 이름은 없습니다. 연가리골에서 마지막까지 살았던 원주민도 그냥 폭포로만 알고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 오래전 눌산폭포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폭포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 사진에 다 담을수도 없습니다. 한여름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폭포를 찾았겠지요. 어른들은 나뭇그늘에 둘러앉아 장기를 두었을 것이고, 발가벗은 아이들은 물놀이에 해가 저무는 줄 몰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떠난 5단폭포는 말이 없습니다. 연가리골에는 크고 작은 폭포가 수십 개나 됩니다.
5월 중순에 접어든 골짜기는 온통 연둣빛입니다. 눈이 부셔 마주볼 수 조차도 없습니다.
골짜기 끝에서 만난 '산채'입니다. '산채'란 나물을 뜯어 삶고 말리는 곳입니다. 보통 5월 한달 내내 이곳에서 생활하며 산나물 채취를 합니다. 곰취 참나물 취나물이 지천으로 널렸으니까요.
연가리골의 끝은 백두대간 주능선입니다.북으로 가면 조침령-점봉산을 지나 설악산이고, 남으로 내려가면 지리산까지 이어집니다. 수많은 대간꾼들의 흔적들이 보입니다. 샘터가 있는 연가리골에서 쉬어갔겠지요.
산이 높으면 나무가 많습니다. 또한 사철 마르지 않는 계곡의 물은 언제가도 철철 넘쳐흐릅니다. 나무의 몸속에 저장된 수분을 갈수기에 배출해 적당한 물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연의 신비는 감히 인간이 범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무분별한 개발은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왔지만 이제는 원시림이란 표현을 써도 될 만큼 넉넉한 숲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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