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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칼럼

[코레일 칼럼] 기차는 나의 스승이었고, 어머니였다.

by 눌산 2010.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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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플랫폼에는 ‘나’ 혼자였다. 승객도 역무원도 없었다. 무궁화호도 새마을호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눈앞에서 열차가 사라질때까지 플랫폼을 떠나질 못했다. 잠시라도 멈춰 서지 않을까 하는 턱없는 욕심에.

필자는 역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열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벌복한 나무를 실은 화물열차 꽁무니를 쫒아 철로를 뛰었다.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기차역은 놀이터였고, 철로는 아이들의 온갖 ‘작당’ 장소였다. 가보지 못한 곳을 향해 떠나는 열차는 ‘꿈’이었다. 그곳은 섬진강과 17번 국도가 나란히 달리는 전라선 압록역이다. 74년 동안 승객과 화물이 드나들었던 압록역은 지난 2008년 12월 1일부터 열차가 서지 않는다. 전라선 직선화 개량공사로 역기능을 상실했으니 문을 닫은 것이다.

 


압록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변역이다.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위치한 압록마을은 예로부터 고운 모래밭이 있어 강수욕장으로 유명하다. 여름이면 형형색색의 행락객들이 강변을 메웠다. 기타를 둘러 멘 대학생들은 밤을 지새우며 추억을 쌓았다. 봄이면 역 주변에는 산수유 꽃이 만발하고 매화가 합세해 꽃길이 펼쳐진다. 섬진강과 보성강의 푸른 물이 합류(合流)하는 곳이라하여 합록(合綠)이라 부르다가 400여 년 전 마을이 형성되면서 맑은 물에서만 자란다는 천어(川漁)와 오리과의 철새들이 많이 날아들어 압록(鴨綠)이 되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명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정동진역에 ‘고현정소나무’가 있다면, 압록역에는 ‘김영애소나무’가 있다. 배우 김영애가 빨치산 남편의 뼈를 지리산 자락에 뿌리고 휘날리는 스카프만 남긴 채 기차에 뛰어 들어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 바로 압록역이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우리 과거사의 진한 아픔을 그렸던 장면으로 아직도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당시 역구내에 있던 소나무는 '김영애소나무'로 불리며 지금도 한편에 서 있다.

해방이후 압록은 벌목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필자의 아버지 또한 목상(木商)으로 압록역은 벌목한 나무의 집합소였다. 한창 때 역주변은 색주가가 대도시 뺨칠 정도로 많았고, 벌목꾼들로 득실거렸다.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당시 압록역 주변 사방 백리 안에 있던 산은 벌거숭이가 됐다. 압록역으로 모여든 나무는 기차를 이용해 서울, 부산, 대전 등 대도시의 땔감이나 선로 밑에 까는 침목용으로 팔려나갔다.

필자는 지금 40년이 지나도록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압록역 플랫폼에 서 있다. 역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지만 열차는 여전히 압록역을 오고갔다. 질주하는 열차를 바라보며 하나 둘 지난 기억들을 끄집어 내본다.

 

국민학교를 갓 마친 친구는 압록역에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가난해서 더 이상의 학업을 할 수 없었던 친구는 구로동 가구공장에 취직을 했다.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그의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별의 시간에도 친구는 듬직해보였다. 남아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또 다른 꿈을 향해 질주를 시작하는 무언의 각오를 다지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 후 그 친구는 젊은 나이에 가구공장 사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었다. 키가 유난히도 작았던 뒷집 누나는 성북동 부잣집 식모로 갔고, 명절이면 선물꾸러미를 양손에 들고 기차에서 내렸다. 일찍이 서울로 떠난 필자의 누이 역시 세련된 '서울여자'가 되어 나타난 곳 또한 압록역이다. 언제나 압록역은 붐볐고, 울고 웃는 만남과 이별의 장소였다. 곡성중학교에 입학해 석 달간 열차통학을 하기도 했다. 선배들로 부터 배운 도둑열차 타는 법은 그대로 후배들에게 이어졌고, 이따금 역무원에게 잡혀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심하게 나무라진 않았던 것 같다. 그 역무원의 아들 역시 공범이었으니까.

모두가 아픈 기억들이다. 상처였고, 두고두고 떨쳐버릴 수 없는 슬픈 기억들이다. 하지만 기차는 꼭 상처만을 남기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게 했고, 가지 않는 길을 향한 끝없는 꿈을 갖게 해줬다. 기차는 난생 처음 바다를 만나게 해줬고, 서울 땅을 밟게 해주기도 했다. 필자 역시 압록역을 통해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 후 단 한 번도 기차를 타고 압록역에 내린 적이 없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련한 기억들에 대한 거부감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가족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압록역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한 장의 사진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룰 수 없는 사랑처럼 말이다.

다 옛날 얘기다. 한때의 영화는 상처로 남았고, 그 시절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강변역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곡성기차마을 종점인 가정역에서 출발한 자전거를 탄 행렬이 압록역 건너편 강변도로를 질주한다. 여유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은 흘렀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은 섬진강뿐이다. 덕분에 섬진강과 기차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압록역 다음 역은 섬진강기차마을이 있는 곡성역이다. 구 역사는 증기기관차의 출발역이 되었고, 전라선 직선화로 옮겨진 새로운 역사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섬진강과 17번 국도를 나란히 달리는 증기기관차는 명물이 되었다. 사실 이렇게 멋진 풍경은 이 땅 어디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추억여행’이다. 그래서 가족 단위 여행자들이 유독 많은 이유이다.

역마을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추억은 필자를 여행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었고, 호기심과 모험심을 길러 주었다. 기차는 나의 스승이었고, 어머니였다. 큰 맘 먹어야 오를 수 있는 높은 산이었고, 맘 단단히 먹고 만나야 하는 짝사랑하는 여인이었다.

<글,사진> 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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