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좋아 산에 사네] 지리산에 흙집 짓고 된장 만드는 총각, 구정제
우수가 지나면서 추위가 한풀 꺾이었다. 스마트폰 하나면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날씨 검색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농사를 짓거나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절기에 의존하며 산다. 어쩜 그렇게 딱딱 들어 맞는지... 절기는 옛 사람들에게 있어 스마트폰이요, 일년 농사의 지표가 되는 셈이다. 꽁꽁 얼어 있던 계곡에서는 물소리가 요란하고, 앙상한 나뭇가지에서는 새순이 돋고 있다. 콘크리트 바닥처럼 딱딱하게 얼었던 땅 속에서는 웅성거리는 생명의 소리가 느껴진다.
만화가 출신 총각이 지리산으로 간 까닭은?
필자는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지리산으로 향한다. 지리산은 섬진강을 끼고 있어 봄이 가장 빨리 오는 곳 중 하나이다. 매화와 산수유꽃이 피고, 논두렁 밭두렁에는 광대나물이며 봄맞이꽃이 피어난다. 봄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지리산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지리산에는 ‘산골생활’을 찾아 들어 간 사람들이 많이 산다. 대부분 독특한 이력을 소유한 개성 강한 사람들이다. 이번 지리산 여행에서 만난 구정제(44) 씨 역시 도시에서는 만화가였다. 지금은 혼자서 흙집 짓고 된장을 만들면서 산다.
구정제 씨는 아직 미혼이다. 된장하면 어머니의 손맛이 아니던가. 그런데 총각이 된장을 만든다? 그렇다면 만화가 출신이니 뭔가 독특한 된장을 만들지 않을까?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런 세속적인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솔직히 “총각이 만드는 된장이 뭐 별거 있겠어“하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그가 지은 흙집을 보고, 그의 생활을 본 느낌은, 역시 세속적인 궁금증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정제 씨의 흙집은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내기마을 해발 550m에 있다. 지리산 자락 정령치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도 2km 쯤 떨어진 외딴집이다. 벽채가 두꺼운 흙이라 집안으로 들어서자 꼭 동굴 속에 들어 앉은 느낌이다. 밖에서는 분명 핸드폰이 잘 터졌는데, 방안에서는 수신률이 낮아 진다. 창문을 열자 멀리 주천 면소재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가을 아침이면 운무에 휩싸인 풍경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서쪽으로 창문을 냈다고 했다. 집 주변은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 하루 종일 해가 들어온다. 1년 6개월 정도 걸렸다는 그의 흙집은 바로 이곳에서 나는 마사토와 돌을 쌓아 지었다.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은 혼자 지었기 때문이다.
“비 올 때가 가장 힘들었죠. 흙은 비를 맞으면 무너지거든요. 힘들만 하면 비가와서 덕분에 쉬면서 일했죠. 인건비도 안들었고, 집 짓는 재료를 주변에서 모두 구했기 때문에 비용도 적게 들었어요. 처음 20평 짓는데 2천 만원 정도 들었어요.”
‘옛말에 게으른 사람이 흙집 짓는다’는 말이 있다. 부지런한 사람이 흙집을 지으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얘기지만, 대신 시간이 더디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콘크리트를 이용한 요즘 집하고는 다르다. 흙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지기 때문에 느리게 지은 흙집은 튼튼할 수 밖에 없다.
“마을 이장 일을 보고 있는 이모부 도움이 컸어요. 처음 지리산에 내려와 이무부 집에서 2년 정도 살면서 일을 배웠거든요. 천안에 있는 통나무학교에서 1박2일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현실은 다르거든요. 실무를 익히면서 혼자 지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죠.”
집을 짓는 동안 이동식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처음 혼자 집을 짓는다고 할 때 가족 누구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광주에 계신 어머니는 벽채를 1m 정도 쌓고 난 후에 오셨다. 된장 담그는 법도 어머니에게 배웠다. 장을 담그는 12월 초부터 한달 정도는 어머니가 와서 계신다. 어머니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셈이다.
어릴적부터 혼자 놀기를 좋아했던 소년 구정제는 만화가 이외에 생각해 본 직업이 없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 당연히 만화가로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으로 유학도 다녀왔고, 서울에서 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우연히 TV에서 보게 된 지리산의 된장 만드는 남자였다.
“솔직히 만화가로 성공 할 자신이 없었어요. 만화그리는 작업은 혼자 하는 일이지만 경쟁 사회나 다름 없거든요. 그러던 중에 TV를 보게 된 것이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이모부가 이 마을에 계셔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어요.”
다음 목표는 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집을 짓고 나서부터 시작한 된장 만드는 일은 올해로 3년 째다. 유일한 홍보는 인터넷으로 카페를 개설해 된장 판매 뿐 만이 아니라 고객과 교류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미미하다. 소량 생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워야 할게 더 많기 때문에 판매보다는 산골생활의 가치창조에 힘쓰고 싶다고 했다.
“소득은 연 사백만원 정도 되요. 도시인들이 들으면 그 수입으로 어떻게 사냐고 하겠지만, 생활비를 하고도 남아요. 산골에서는 돈 쓸 일이 거의 없거든요. 아직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판매보다는 맛과 질이 우선이니까요.”
전라남도 화순 시골출신이었기에 산 생활 적응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콩농사도 짓는다. 콩은 된장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것은 마을에서 구입한다. 올해부터는 마을 매니저 일도 시작했다. 산촌생태마을로 지정 된 고기리 내기마을은 산나물로 이미 소문난 곳으로 산림청 공모사업에 선정 되 마을 주변 낙엽송 숲에서 곰취를 대량 재배할 계획이다. 마을 매니저는 이런 사업을 홍보하고 찾아오는 도시인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모부인 마을 이장 조선행 씨는 “우리마을은 해발 500m가 넘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곰취재배로 최적지에요. 마을 옆으로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고 지리산국립공원이 있어 자연경관 또한 뛰어난 곳이죠. 이런 자원을 잘 활용해서 도시인들에게 질 좋은 산나물을 판매 할 생각입니다.”
지리적으로 내기마을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바래봉과 정령치 등 지리산의 1천 미터가 넘는 고봉으로 둘러 쌓여 있어 예로부터 산나물 산지로 유명했던 것이다. 산나물 이외에도 이른 봄에는 고로쇠 수액이 많이 난다
구정제 씨는 내기마을의 명물인 산나물 맛을 보여주겠다며 마을 구판장으로 안내했다. 한상 가득 차려진 나물만 무려 스무가지가 넘었다. 취나물, 참나물, 두릅, 고사리 등 모두가 지리산에서 나는 것들이다.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는 맛이 일품이다.
구정제 씨의 다음 계획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는 일이다. 된장을 사가는 고객들과 지리산 둘레길을 찾는 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를 지를 계획이다. 이 역시 혼자 틈나는데로 시작할 생각이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전혀 생각이 없던 결혼도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산골생활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여자라면 함께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지난 가을에는 구정제 씨의 삶이 모 방송에 소개 됐다. 그때 함께 출연한 어머니가 공개구혼을 하면서 몇사람이 다녀갔다고 한다. 조만간 그가 그리는 가족 그림에 또 한명이 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글, 사진> 여행작가 눌산 http://www.nulsan.net
월간 산사랑 (http://sansarang.kfcm.or.kr)에 기고한 자료입니다.
구정제 씨 인터넷 카페 http://cafe.daum.net/gujungje
'여행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이 좋아 산에 사네] 영월 첩첩산중에 초가집 지은 전봉석 오경순 부부 (4) | 2012.07.13 |
---|---|
[산이 좋아 산에 사네] 난치병 환자에서 덕유산 산꾼이 된 임용재 씨 (3) | 2012.05.14 |
[산이 좋아 산에 사네] 강원도 양양 느르리골에서 시작한 인생2막 (2) | 2012.02.03 |
[산이 좋아 산에 사네] 귀촌 1년 차 신혼부부의 꿈 (1) | 2011.12.06 |
간이역에서 아이들의 꿈동산으로 거듭난 '연산역' (0) | 2011.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