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사람’이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사람의 마을’이 있었다. 아름드리 신갈나무와 떡갈나무 군락지 한가운데로 난, 두 사람이 손잡고 걷기에 딱 좋을 만큼의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숲길이다. 한낮에도 어둠이 내린 숲길에는 온갖 풀꽃들로 가득하다. 풀꽃 향기에 취해 숲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하늘은 열리고 그 길 끝에서 사람의 마을을 만나게 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다. 하지만 분명 그곳에는 대여섯 가구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동차로는 갈 수 없는, 전기도, 전화도 없는 오지마을이다. 영화 속에서나 만날 법한 이 그림은 이미 이십 년도 넘은 얘기다.
그 길 끝에서 만난 ‘사람의 마을’
‘그 길’은 지금 야생화의 보고로 알려진 ‘곰배령 가는 길’이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남설악의 중심인 점봉산 자락에 위치한 곰배령은 야생화의 천국이다. 필자에게 오지여행가란 직업을 만들어 주었던 ‘곰배령 가는 길’은 봄부터 이른 가을까지 피고지고를 반복하며 온갖 야생화가 자란다.단언컨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 자부한다.
직장인이던 그 시절 필자는 거의 매주 곰배령에 올랐다. 길가에 지천으로 널린 복수초, 노루귀, 꿩의 바람꽃, 홀아비바람꽃, 얼레지, 금강초롱 같은 풀꽃의 이름을 하나둘 알기 시작했고, 갈 때마다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 오로지 정상정복을 목적으로 올랐던 산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무와 풀과 꽃 하나하나를 눈에 담게 되었다. 아마도 세상에 대한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등산보다는 단순한 걷기에 열중했고, 골골마다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오지마을 찾아 다녔다. 요샛말로 얘기하자면, 그게 바로 트레킹이었던 셈이다.
그 후 필자는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사를 차렸다. 걷기의 매력에 푹 빠져 결국은 트레킹 전문여행사를 차린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가당치도 않은 사업이다. 하지만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하나둘 모여 들었다. 오지트레킹, 들꽃트레킹, 섬트레킹, 계곡트레킹 등 당시에는 생소한 여행상품을 내 놓았고, 나름 안적적인 운영을 할 수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걷기열풍에 버금가는 인기도 누렸다. 더 나아가 최소한의 생존 장비만을 챙겨 1박 2일 이상의 장거리 트레킹을 하는 백패킹도 시도를 하였다. 함께 걷고 비박을 하기도 하며 때론 오지마을의 외딴 집에 들어 가 하룻밤 먹고 자는 체험은 유명 관광지에 신물이 난 이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트래킹이 성공했던 것은 10명 이내의 소수여행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트레킹’이란 뭘까.
트레킹(trekking)의 어원을 보면 ‘길+ing’다. 길을 따라 가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트레킹에 포함된다. 본래는 남아프리카 원주민의 언어로 달구지를 타고 수렵지를 찾아 집단이주하다는 뜻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소달구지를 타고 여행하듯 천천히 걸어서 여행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앞만 보고 달리는 현대인들이 잠시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레포츠로 트레킹이 인기가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단순하다는 것, 그리고 코스와 일정 등을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자연과 하나되는 트레킹
요즘 걷기가 대세다. 아니 열풍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걷기 관련 상품이 봇물을 이루고, 한집 건너 아웃도어 용품 전문점이 들어서 있다. 2층을 올라가는데도 엘리베이터를 타던 사람들까지 걷기에 열광한다. 그 이유가 뭘까. ‘걷기’에는 절차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떠나면 그만이니까. 복잡한 요즘 세상에 참 단순하기 그지없는 여가생활 아닌가.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걷기에 열광한다. 등산을 즐기던 이들까지 합세해 이젠 온 나라가 거대한 하나의 길로 연결되었다. 등산보다 ‘걷기’에 더 매력을 느낀다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등산과 걷기의 차이는 뭘까. 등산은 수직이동이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그에 반해 걷기는 산 아랫도리를 수평으로 이동한다. 수직이동을 통해 보고 듣지 못했던 것을 걷기에서 얻을 수 있다. 등산이 앞만 보고 달리는 현대인이라고 한다면, 걷기는 삶의 질을 우선으로 하는 슬로우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걷기열풍은 아마도 지난 2007년 처음 열린 제주의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그 단초라 할 수 있다. 그로인해 전국의 지자체들은 앞다투어 '길'을 만들었고, 사람들이 그 길로 몰려 들었다.여행문화에도 유행이 있듯 먹고 마시는 향락위주의 여행이 자연과 교감하는 여행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체험여행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단순한 ‘걷기’는 이제 ‘트레킹’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사실, 본격적인 트레킹은 동강댐 건설 논란이 한창이던 1999년 무렵이다.
1990년대까지는 주로 네팔이나 인도 등 히말라야와 알프스 등 장거리 산행을 트레킹이라 불리던 것이 ‘걷기=트레킹’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석회함 지층의 오묘한 자연경관이 마치 그랜드캐년과 비슷하다 하여 관심을 불러일으킨 강원도 영월의 동강에 댐이 건설된다는 논란이 일면서부터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강은 뱀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을 한 사행천(蛇行川)으로 걷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동강을 보기 위해서는 트레킹만이 제격이었다. 짧게는 두어 시간에서부터 길게는 2박3일의 일정을 잡아야만 동강을 제대로 볼 수 있어 큰 배낭에 텐트와 취사도구를 짊어지고 ‘동강트레킹’을 떠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트레킹 문화의 대중적인 보급은 제주의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겠지만 트레킹이 대중들 사이에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던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동강댐 건설 논란이 한창이던 1999년 트레킹 전문여행사를 접었다.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이었지만, 소수여행을 추구하던 필자의 여행철학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동강에는 다리가 없었다. 강 건너 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다. 많게는 수 백 명이 두세 번 나룻배를 타고 이동해야 했던 것이다. 그만큼 동강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에 동강트레킹 상품은 내 놓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여행사가 잘 될수록, 소수인원이 천천히 걸으며 자연과 호흡하는 게 목적인 트레킹의 취지와는 맞지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접었다. 그 후 필자는 혼자 걸었다. 굳이 코스를 따지지 않고 걷기 좋은 길이라고 판단되면 무작정 걸었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사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가장 긴 걷기여행은 낙동강이었다. 태백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낙동강 1300리 길을 52일 동안 걸었다. 초반에는 마을 정자에서 텐트를 치고 자기도 했지만, 그저 걷는 게 목적이 아닌 길에서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숙박은 주로 민박을 이용했다. 필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트레킹의 의미는 바로 ‘사람’이다. 풍경은 유명 관광지가 더 낫다. 하지만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풍경 이상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평범한 마을이지만, 나름의 역사와 문화가 있고 그 지방만의 특색이 있다. 굳이 소문난 여행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얘기겠지만 여행에서 음식은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 요즘은 음식이 주가 되는 여행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취사를 반대한다. 하루나 이틀 여행을 하면서 음식을 바리바리 싸가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특히 그 지역 토속음식을 맛보는 것이야 말로, 그 지역문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도움이 된다.
사람마다 보고 느끼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길에서 만나는 소소한 이야기들은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람이든, 이름 모를 풀꽃이든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다시 배낭을 둘러메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 사진> 여행작가, 오지여행가 최상석(눌산) http://www.nulsan.net
[트레킹 TIP]
일단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안전한 걷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발이다. 모든 체중이 발에 집중되므로 편안하게 걷고 발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트레킹화가 필수적이다. 평지라면 트레킹화가 제격이고, 산길이라면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 일반 운동화는 발에 무리를 줄 수 있고 피로도가 높기 때문에 반드시 용도에 맞는 신발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배낭에는 물과 간단한 행동식, 그리고 방풍자켓을 넣고, 스틱도 꼭 챙기는 것이 좋다. 스틱은 다리가 받는 하중을 분산시키고, 무릎과 허리의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걷는 속도는 평상시 걷는 속도의 절반 이상이면 적당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트레킹은 정상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등산과는 달리 목적지 중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편안한 호흡을 유지하면서 찬찬히 주변을 살피는 여유로움 걸음걸이가 적당하다. 성인의 경우 보폭은 70cm 내외, 1분에 1백여 보 내외의 속도로 하루에 10∼20km를 걷는 것이 좋다.
최상석(눌산. 訥山) 씨는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전라남도 곡성 태안사에서 태어 났다. 취미로 즐기던 오지여행을 상품화해 ‘오지여행자클럽‘이라는 트레킹 전문회사를 잠시 운영했으며, 강원도 인제와 충북 영동 등 오지마을 외딴 집에서 10여 년 살기도 했다. 현재는 전북 무주에서 ’여행자의 집‘을 운영하면서 지방자치단체와 기업체·학교 등에서 '사람과 자연'을 주제로 강의를 하고, 오지마을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글로 전하는 여행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전원생활 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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