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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오지

전쟁도 피해간 오지마을, 단양 피화기마을

by 눌산 2008.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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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도 피해간 오지마을, 피화기


남한강이 휘감아 돌아 나가는 단양 땅에 들어서면  쉽게 접하는 골짜기들로 인해 이 땅의 절반의 모습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넓은 땅을 갖고 있으면서 84%에 달하는 산지가 협착한 골을 만들고, 곳곳에 숨은 명승절경이 많기 때문. 단양에서도 손꼽이는 오지라 할 수 있는 피화기 마을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성금마을과 말금마을이 마주 보고 있는 산꼭대기 마을이다.

비 그친 후 피알기 마을, 안개로 자욱하다.

단양의 관문, 도담삼봉

단양의 관문은 단양팔경 중 한 곳인 도담삼봉. 남한강의 맑고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강 한가운데 높이 6m의 늠름한 장군봉(남편봉)을 중심으로 처봉과 첩봉 세 봉우리가 물위에 솟아있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만큼 젊은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을 미워하여 돌아앉은 본처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살펴 볼 수록 그 생김새와 이름이 잘 어울려 선조들의 지혜와 상상력에 새삼 감탄스럽기만하다.


성금마을의 시묘막

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 땅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 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으며, 그 이후 매년 단양에서는 정선군에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어린 소년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소백산이 나지막이 어깨를 낮추는 그 자리, 남한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무수한 세월의 풍파를 견디어 온 강줄기야말로 산중 사람들의 삶과 견줄만한 끈질긴 생명력이 느껴진다. 산중으로 파고드는 길은 지루하지가 않다.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의 마을을 찾아가는 길, 그곳에 사람이 있어 홀로 걷는 길이건만 늘 새롭기만 하다.


김경호 할아버지 댁. 10남매 모두 이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전쟁도 피해간 오지마을 피화기

피화기마을의 본래 이름은 피알기다. 1.4후퇴때 평안도 사람들이 피난 내려와 정착한 마을로 '피난'이 '피알'로 변한 것인데, 어느 때부터인가 한자화 된 지명인 피화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명이야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피화기마을의 들목을 지키는 유일한 문명의 산물인 '피활기교' 다리가 눈에 거슬린다. 다리 공사를 하면서 잘못 전해들은 지명을 그대로 표기한 것이란다.


아무튼 옛 지명을 찾다보면 이런 웃지 못할 장면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때 뜻도 없이 뜬금없는 지명으로 뒤바뀐 경우나, 대충 땜방하는 식의 행정이 서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말금마을의 암수소나무, 멀리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피화기 마을이 보인다.

피화기 마을로 오르는 길은 승용차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비탈진 길이다. 경사가 급해 콘크리트 포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등산이나 다를 바 없는 수고가 필요한데, 코가 땅에 닿을 만큼 경사가 가파르다보니 그도 그럴 수밖에.

피화기마을의 첫집을 지키는 최OO 할아버지, 부친을 따라 여섯 살 때 평안도 순천에서 이 곳으로 왔다.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 적힌 이상향을 찾아 든 1세대 원주민이다. 시대적인 상황이 이 멀고 낯선 타향살이를 시작하게 했지만, 어린 아들과 새로운 세상을 찾아들었던 것은 아마도 땅에 대한 애착이 더 컷기때문이리라.

"초등 학교를 여기서 다녔지, 새벽밥 먹고 먼동이 트기 전 집을 나서도 늘 지각이었어."
"아, 오죽했으면 지각대장이라고 불렀을까."

단양읍내에 나가 택시기사를 하며 젊은 청춘을 다 보내고 다시 이 곳으로 들어 온 건 20여 년 전이다. 갈 수 없는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이 재정착을 하게 했다고.


고랭지 채소밭

피화기의 본 마을은 최OO 할아버지 댁에서 다시 한참 올라야 한다. 딱, '하늘 아래 첫동네'가 바로 이런 곳이구나를 느낄 수 있는 산꼭대기에 있다. 6가구에 주민은 10명 남짓, 홀로되신 분들이 많아 그렇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배추밭의 김을 매고 있는 정길녀 할머니를 만났다. 역시 평안도에서 이 곳으로 이주한 1세대 원주민으로 15살 때 결혼해서 60년 간 평생을 함께해 온 김경호 할아버지가 말없이 곁에 앉아 계신다. 아들 다섯에 딸 다섯, 모두 10남매를 두었다는 노부부의 삶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은 텃밭은 60년 세월의 애환이 깃든 소중한 터전인 것이다.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는 낯선 방문객이 반가워 피화기의 자랑을 늘어놓으신다.

"개울물 떠서 마셔봐. 아, 더위도 모르고 세월 가는 줄도 몰라."


떠난 자리의 흔적, 성금마을 가는 길은 걷기 좋은 흙길이다.

닮은꼴이 많은 쌍둥이 마을, 성금과 말금

성금과 말금마을은 피화기 마을에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멀리뛰기라도 한다면 한 발짝에 건너 뛸 것만 같은 아주 가까운 거리다.

산은 이렇게 금을 그어 놓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하듯 마을은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잡았다. 넓은 들이 많은 아랫지방에 비해 이렇게 산중마을들은 부족한 농토 때문이다. 고추와 담배농사가 주업으로 해발 600m를 오르내리니 고랭지 채소재배지로 적격인 것이다.
멀리 소백산 연화봉이 눈에 들어온다. 눈 높이가 서로 다르지 않으니 그만큼 지대가 높다는 얘기.

성금마을 가는 길목에는 요즘 보기 힘든 귀한 보물이 있다. 이 마을의 소문난 효자가 2년8개월간의 시묘살이를 한 시묘막이 그것인데, 두다리를 펼 수조차도 없는 1.5m의 좁은 공간이 전부다. 삭막하기만 한 요즘 세상에 시묘막이 왠말인가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그랬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세상을 살아왔지만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최소한의 예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말금마을의 옻나무 아래로 흐르는 옻샘


바로 질서가 아닐까. 자연에도 법칙이 있듯,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다 할 때 질서가 바로서는 것이다.

성금마을에서 말금마을로 내려서는 길은 어른의 키만큼이나 풀이 우거져 있다. 몇 가구 살지 않다 보니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일 것이다. 금이 "섬"으로 나서 성금, "말"로 나서 말금이라 했다는 지명 유래를 전해듣고 그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금광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가 없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금덩이 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

바로 암수 소나무와 옻나무 샘. 하늘을 향해 허리를 곶추 세운 숫소나무와 90도로 허리를 낮춘 암소나무, 백년이 넘은 옻나무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옻샘은 마을의 상징이자 자존심. 산아래 옹졸한 사람들의 잘못을 너그러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산중 사람들의 큰마음 씀씀이가 이렇게 특별한 물과 나무를 지니게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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