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눌산 (http://www.nulsan.net)
충남 금산에서 대둔산 자락 이치(梨峙)를 넘었다. 금산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전북 완주군에 들어서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야트막한 산세의 금산 땅과는 달리, 단풍이 붉게 물들어가는 기암절벽이 낯설다. 근처에서는 보기 드문 암봉으로 이루어진 대둔산 일대는 강원도 못지않은 산악지역이다. 오죽하면 대둔산을 ‘호남의 소금강’이라 했을까. 산세뿐만이 아니라 농가의 풍경까지도 다르다. 완주군 운주면 일대는 요즘 곶감을 만들기 위한 감 따기 작업이 한창이다.
30년 만의 귀향, 곶감농부로 제2의 인생 시작하다
운주면 소재지 직전에서 왼쪽 골짜기로 들어선다. 대둔산(878.9m)과 천등산(707m), 선야봉(755m) 아래 금당리와 고당리를 중심으로 금당계곡과 고당계곡, 피묵계곡이 한없이 이어진다. 이 길고 험한 골짜기 덕분에 자연부락이 수십 개나 자리잡게 되었다. 골짜기 중간 쯤에 위치한 원고당마을에서 감따기 작업이 한창인 박용민(45) 씨 가족을 만났다. 지난 가을 새로 지은 아담한 전원주택에서 박용민 씨와 아내 이현주(38) 씨와 영준(8), 은별(6) 네 가족이 살고 있다.
박용민 씨 가족은 6년 전 중학교 때 떠난 고향으로 돌아왔다. 제2의 인생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 셈이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농사도 해봤고, 마을 전체가 계곡 유원지다 보니 여름철 피서객들을 상대하는 ‘여름장사’도 해보았지만, 경험이 없다보니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자동차회사를 15년 다녔어요. 중간관리자였는데 팀원 15명 중에 8명이 정리해고를 당했죠. 저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됐지만, 팀원이 잘려 나가는 상황에서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개인사표를 던져버렸어요. 퇴직위로금 같은 것도 받지 못했고, 더구나 결혼한 지 2개월 된 신혼이었거든요.”
순간, 박용민 씨의 아내 이현주 씨의 표정을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혼 2개월 된 가장이 별안간 사직을 한다니 얼마나 놀랬을까 싶은 마음에서다.
“늦은 나이까지 공부만 하다 결혼을 하고, 사회생활 경험이 전혀 없던 상태라 처음에는 두려움도 있었죠. 하지만 남편을 믿고 별 생각 없이 남편 고향인 운주에 가서 살자는 말에 동의했어요. 처음 2년 정도는 남편 혼자 내려와서 집을 짓고 생활하다가 저는 큰 아이 돌이 지날 무렵에 내려왔어요.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적응이 안 돼 많이 힘들었어요. 첩첩산중에 만날 사람도 없고, 갈 데도 없잖아요. 그러다 2년 전부터 지금 다니고 있는 완주 귀농귀촌지원센터에 출근하면서 안정이 되었답니다.”
박용민 씨가 처음 지었던 집은 계곡 하류 쪽에 있는 원금당 마을에 있었다. 급한 마음에 집부터 짓다보니 땅도 비좁고 도로변이라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지난 가을 지금의 새집을 지었다. 마당이 넓어서 아이들이 놀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더구나 집 바로 앞에 계곡도 있다. 넓은 암반이 웬만한 유원지 못지않다. 여름이면 아이들은 계곡을 통째로 전세 내서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한다.
“귀향의 동기부여는 사직이었지만, 지금은 두 아이를 가장 우선으로 두고 귀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도 옮겼고, 감농사와 곶감에 주력하는 것도 10월부터 2월까지만 집중해서 일하면 되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활용할 수 있거든요.”
<사진> 박용민 제공
일상이 여행이다
그가 말한 나머지 시간의 활용이란 여행이다. 8살 영준이는 이미 소년 도보여행가 소리를 듣는다. 보길도 일주와 섬진강 도보여행도 했고, 주말이면 텐트 하나 들고 대둔산에 올라가 야영을 한다.
“등산은 제 취미였어요. 직장생활하면서 전국의 산을 누비고 다녔죠. 이곳으로 내려온 후로는 큰 준비 없이 그냥 떠나면 될 만큼 좋은 산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등산을 하게 되었고 영준이가 자라면서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같이 데리고 다녔어요. 그런데 지금은 영준이가 더 좋아라 합니다. 특히 도보여행을 좋아해요. 오히려 지금은 제가 힘들어 해서 생각해 낸 게 바로 리어카여행입니다. 리어카에 야영에 필요한 짐을 싣고 다닙니다. 먹고 자고 해야 하는 도보여행이라 짐이 많거든요, 배낭 하나에 다 담자니 제가 너무 힘들어서 생각해 낸 방법이죠.”
손수레 도보여행을 하게 된 계기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여행을 생각하면서부터다. 등산은 여행의 개념보다는 정상 정복이 목적이다 보니 아이의 속도에 맞추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하지만 도보여행은 천천히 걷는 게 가능했다. 아이의 걷는 속도에 맞춰 느리게 걷는 묘미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된다. 걷고 싶은 만큼, 시간이 되는 만큼 만 걸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했다.
“어릴 적 아버지가 태워주시던 리어카 생각이 났어요. 많은 짐을 실을 수 있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느린 여행을 하기에 리어카가 제격이라 생각했죠.”
지난 여름에는 6박 7일 동안 영준이와 둘이서 섬진강 리어카 도보여행을 했다. 8살 아이가 하기에는 무리일 듯 싶었지만, 7일 동안 내내 힘들단 소리 한번 안하고 잘 걸었다. 오히려 아빠가 힘들까봐 오르막에서는 리어카를 밀어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떤 여행을 해야 할까 고민도 많았지만 막상 떠나고부터는 그런 생각들이 기우라는 것을 알았다. 걷다 힘들면 마을 정자에서 쉬고, 어린 영준이를 보며 대견하다며 몰려드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아이들 교육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치고, 또 알려주려고만 하죠. 하지만 도보여행을 하면서 스스로 보고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걸을 때는 몰랐는데, 도보여행이 끝난 후 가끔 그때 얘기를 합니다. 상류에는 바위가 많았는데, 점점 모래가 많아지더라는 얘기나 작은 실개천이 점점 넓어져서 큰 강이 되는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더라고요. 특히 강의 끝에서 바다를 만나는 광경을 보면서 그동안 걸어 온 길에 대한 기억들 하나둘 끄집어내는 것을 보고는 제가 놀랬죠.”
뜻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직을 하고 농부가 된 것을 부부는 후회하지 않는다. 두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잘 선택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박용민 씨와 이현주 씨는 예비 귀농귀촌인들을 위한 멘토 일을 하고 있다. 박용민 씨는 완주군 귀농귀촌협의회 사무국장이고, 이현주 씨는 완주 귀농귀촌협의회 상근직원으로 일한다. 그들처럼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이들을 안내하고 조언한다. 그때마다 자신들의 경험을 얘기한다.
“가끔 예비 귀농인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이 1년 수입에 관한 것입니다. 그때마다 저희 부부는 돈 벌려면 내려오지 말라고 합니다. 농사지어서 돈 벌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다만,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먼저 고민해보라고 합니다. 수입은 적지만, 삶의 질은 도시보다 농촌이 훨씬 높으니까요. 욕심만 조금 버리면 얼마든지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가 있는 곳이 바로 농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완주는 박용민 씨의 나고 자란 고향이지만, 낯선 땅이나 다름없었다. 오래전 떠나면서 집도 땅도 하나 남아 있지 않았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박용민 씨는 농사일은 초보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한 덕분에 원금당 마을 이장을 4년이나 했다. 그것은 마을에서 인정받았다는 얘기도 된다. 마을 일을 보면서 농촌생활의 자신감을 얻었고, 다른 사람들 보다 빨리 자리 잡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일상이 여행 같아요.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부딪치는 일들이 많잖아요. 좋은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고요. 그런 상황을 잘 헤쳐 나가는 것이 삶인데, 여행이 딱 그렇더라고요. 여행을 하다보면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하다보니 매사가 긍정적으로 변하게 되요. 큰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이 말이죠. 그런 마음으로 귀농하면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용민 씨 가족은 넓은 마당에 가끔 텐트를 친다. 텐트 속에서 바라보이는 작은 문으로 더 넓은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다음에는 어디를 걸을까?”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그 순간이 그는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한국 산지보전협회 격월간 산사랑 11+12월호 (http://kfca.re.kr/sanFile/web11/sub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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