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소읍(小邑) 기행 다섯 번째 / 강원도 양양·경상북도 춘양
폭설 내린 골짜기서 만난 겨울
이제, 겨울답다. 춥고 눈 내리는 날이 잦다. 동·서해안을 중심으로 꽤 많은 눈이 내렸다. 영동지방에는 올겨울 들어 세 번째 폭설이 내렸다. 양양에 사는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배! 50㎝야, 빨리 와서 눈 치우는 것 좀 도와줘야겠어.” 말이 그렇지, 눈 치워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눈 핑계 삼아 하던 일 멈추고 좀 쉬자는 얘기렷다. 후배는 요즘 손수 집 고치기에 바쁘다. 열일 제쳐 두고 동쪽으로 달렸다.
▲50㎝가 넘는 폭설이 내린 강원도 양양 어성전 마을.
강원도 양양 / 폭설 속에서 만난 따뜻한 겨울
양양 가는 길은 고속도로와 국도로 나뉜다. 목적지 중심의 여행자라면 고속도로를 탈 터이고, 과정을 즐기는 여행 매니아라면 국도를 탈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와 같다. 자연스럽게 몸이 먼저 길을 알고 찾아간다.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바꿔 타고 횡성 나들목으로 빠져나왔다. 횡성에서부터는 19번과 56번 국도를 따라갈 예정이다. 이 길은 휴가철 고속도로가 정체되면 고속버스도 이용하는 지름길이다. 횡성댐을 지나면서 전형적인 강원도 산간지방 풍경이 펼쳐진다. 홍천 서석에서 내면에 이르는 하뱃재와 상뱃재 사이에서는 기이한 현상도 만날 수 있다. 오르막은 있는데 내리막이 없다. 즉 고원분지란 얘기다. 홍천과 양양군의 경계인 해발 1013m 구룡령을 넘는다. 잘 알려진 한계령보다 높다. 굽이가 아홉 굽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구룡령이지만, 실제는 수십 굽이도 더 된다. 상징적인 의미라 할 수 있다.
▲홍천과 양양군의 경계인 해발 1013m 구룡령
폭설 소식을 전한 후배는 동호해변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인 상양혈리에서 정선에 이어 두 번째 귀촌 생활을 막 시작했다. 허름한 농가주택을 구입해 1년 계획으로 손수 집수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50㎝에 이르는 폭설에 마을은 눈 속에 푹 파묻혀 버렸다. 집으로 향하는 길만 겨우 트인 상황.
“밤새 치우고, 오늘도 종일 눈을 치웠는데 표시도 안 나네. 이제부터는 저 알아서 녹겠지. 서울 사람들은 절대 모르는 맛집 알아놨으니까, 갑시다!”
산촌 생활 십수년에 느긋한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말투다. 후배를 따라 간 곳은 수산항이다. 작은 포구는 그대로이지만, 요트장이 생기면서 펜션과 게스트하우스도 들어섰다. 후배가 추천한 메뉴는 째복탕.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다. 알고 보니 동해안의 맑은 물 모래 속에서 사는 민들조개란다. 밥숟가락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조개로 동해안에서 나는 다른 조개에 비해 크기나 모양이 보잘것없어 쩨쩨하다는 의미로 째복이라 했단다. 이 지역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지겹도록 먹어왔고, 발길에 걸릴 정도로 흔해서 푸대접을 받아왔다. 그러다 요리로 개발이 되면서 그 맛에 반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후배가 그토록 극찬한 째복 맛은 어떨까. 국물은 재첩국이나 바지락 국물이 떠오를 정도로 비슷하다. 진하지만 끝맛이 부드럽고 순하다. 재첩에 비해 크기가 월등하기 때문에 도톰한 조갯살을 입안에 가득 물고 씹으면 식감 또한 일품이다. 째복은 맑은탕과 얼큰한 국, 무침, 전, 장칼국수, 물회로도 먹을 수 있다. 보통 물회는 활어를 사용하지만, 째복물회는 삶아서 사용하기 때문에 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수산항 횟집의 째복물회
어둠이 내린 수산항 산책에 나선다. 동해안 일대에서는 비교적 호젓한 바닷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포구 중 하나다. 폭설에 겨우 사람이 다니는 길 정도만 열려 바다 가까이 접근도 할 수 없다. 대신 희미한 불빛을 찾아 들어간 한옥 게스트하우스에서 낯선 여행자들과 서로의 여행담을 나눌 수 있었다. 머리를 숙여야 할 만큼 낮은 천장과 툇마루 한편에 놓인 장작난로의 온기 덕분에 최강 한파라는 추위 속에서도 따뜻한 밤이 되었다. 이름도 재밌는 누룽지게스트하우스 주인장 표언재씨 역시 여행자다. 툭하면 문을 걸고 여행을 떠난다. 최근 화재로 집을 잃은 가족을 위해 여행자들과 함께 모금활동도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인명구조직 종사자는 숙박비용이 무료다. 나 홀로 여행자들이 많은 탓에 4인 이상은 받지 않고, 한두 명 소수 여행자를 우선으로 한다.
다음날에도 여전히 한파가 이어졌다. 남대천은 꽁꽁 얼었고, 해변에는 모래 한 톨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쌓여 있다. 백사장이 아닌, 눈길을 걷는 여행자들과 약간의 경사만 보이면 눈썰매를 타는 아이들 모습이 보인다.
양양을 ‘해오름의 고장’이라 한다. 바다 덕분이다. 하지만 산촌 비중도 꽤 크다. 남설악에서부터 홍천군과 경계인 구룡령에 이르기까지 골골마다 사람의 마을이 있다. 남대천 상류 어성전은 부연동과 법수치, 면옥치, 연화동, 달하치 계곡을 품은 곳으로 ‘고기가 밭을 이룰 만큼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한때는 오지로 소문난 곳이었다. 주변에 물 좋은 계곡이 많은 덕분에 어성전은 여름 여행지다. 대신 겨울은 고요하다. 눈 쌓인 골짜기를 걷는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다. 우두둑, 소나무에 걸린 눈덩이가 녹아 떨어지는 소리와 타이머처럼 간간이 울어대는 까마귀 울음소리, 얼음장 아래 흐르는 물소리. 겨울 골짜기를 걷는 매력은 넘친다. 트레킹 코스로는 어성전 삼거리에서 법수치 계곡까지 다녀오는 것을 추천한다.
▲양양 전통시장
어성전에서 만난 김석기씨는 양양이 고향이다. 아웃도어 전문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다 사표를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무계획이었다. 대신 언제나 든든한 어머니와 건강한 청춘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게스트하우스를 통해 찾아오는 여행자들과 세상과의 소통을 한다. 그리고 고향 양양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시장 벽화가 그것. 어려서부터 취미로 그린 그림 실력이 출중하다. 자원봉사로 양양 전통시장 벽화를 그렸고, 양양의 자연과 문화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무한한 자원을 갖고 있는데, 지역에서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아요. 산과 바다를 통한 관광자원 개발에만 힘쓰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웠죠. 집밥처럼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토속 음식과 트레킹 코스를 개발하고 있답니다.”
김석기씨가 개발한 트레킹 코스는 직접 인솔해서 찾아간다. 알려지지 않은 폭포나 옛길 등 그의 주 관심사였던 것들이 모두 그만의 상품이 되었다. 트레킹뿐만이 아니라 양양의 숨겨진 속살을 다 꿰고 있다. 김석기씨의 어머니를 통해서는 토속적인 양양 지역의 집밥 맛을 볼 수 있다. 천초(제피)가 들어간 감자만두라든가, 미역장국, 취나물의 일종인 개미취로 지은 뚜깔밥 등 일반 음식점에서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음식들이다.
양양 읍내로 향한다. 장날이 아니라 비교적 한산하다. 양양 장터는 산과 바다를 접한 덕분에 농수산물과 임산물이 모두 모여 언제나 풍성하다. 제철 맞은 양미리와 동태 꾸러미가 줄줄이 걸려 있다. 어성전에서 만난 김석기씨의 벽화는 시장 문화카페 계단에서 만날 수 있다.
양양에도 전국 어디에나 있는 ‘걷기길’이 조성되어 있다. ‘연어의 고향 남대천길’이란 이름의 이 길은 양양대교 북단에서 다리를 건너 냉수성어류연구센터와 구탄봉으로 이어진다. 한겨울에 걷기에는 강바람이 부담이 된다. 대신 남대천변 송이조각공원 주변 산책을 권한다. 갈대와 억새 숲에는 요즘 한창 철새들이 날아들어 볼거리를 주고 있다. 양양군청 옆 현산공원에 오르면 양양 읍내와 멀리 설악산, 동해바다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자연샘 메밀국수집 옆 골목으로 오르면 고려 때부터 성황제 제수(祭需)로 사용했다는 고치물샘터가 있다.
▲자연샘 메밀국수집 옆 골목으로 오르면 고려 때부터 성황제 제수(祭需)로 사용했다는 고치물샘터가 있다.
여행 Tip |
경북 춘양 / 한 시대 풍미했던 춘양역서 장터까지
춘양(春陽)에 가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봄볕’이라는 이름 그대로 따뜻한 고을쯤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춘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지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평균 기온이 낮은 곳이다. 기상청 자료에 의하면 봉화 지역이 2000년 이후 일최저기온 영하 27.7도로 전국 2위였다. 산지의 비중이 전체 면적의 80%가 넘고 해발 1000m급 산이 고을 전체를 두르고 있는 지형적인 영향이라 할 수 있겠다.
▲ 26년째 춘양역 앞에서 문을 열고 있는 태양다방, 커피값이 17년째 1500원이다.
춘양 취재를 간 날 역시 한파가 전국을 휩쓸고 있던 때라 아침 기온이 영하 17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햇볕이 좋고 바람이 없어 그런지 그렇게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춘양이라는 지명이 붙지 않았을까. 춥지만 볕이 좋아 따뜻한 고을이라고. 역설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춘양은 분명 따뜻한 고을이었다. 1박2일 동안 춘양에 머무르면서 만난 춘양 사람들 역시 인심 좋고 정이 많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뜨거운 보리차를 건네며 손이나 녹이고 가라는 시장 상인처럼 말이다. 딱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그는 처음 만남에서 약속했던 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꼭 밥 한번 먹읍시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두 번째 만남에서 그는 지켰다.
남영일씨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춘양을 떠난 지 십수년 만에 귀향했다. 부친의 가업을 물려받아 송이 도매업과 작은 카페 겸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카페는 춘양 사람들의 사랑방이다. 터미널 입구 목 좋은 쪽에 위치해 있어 오다가다 들르는 사람들이 많다.
“봉화에는 개도 송이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어요. 얼마나 많이 나는지 논두렁에도 송이가 난다고들 하죠. 늘 송이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요즘은 춘양 인근 산을 섭렵하고 다닙니다. 주변이 다 산이잖아요. 어려서는 잘 몰랐는데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고향에 대한 애정이 생기더라고요.”
▲ 춘양터미널 앞 쌀을 찧는 정미소 풍경
고향에 돌아온 후 그는 산악인이 되었다. 그동안 몰랐던 춘양의 자연을 탐닉하며 춘양을 찾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카페는 당연 그의 아내 김미경씨의 몫. 서울의 소문난 제빵 장인에게 배웠다. 특별한 비법이 없다고 하는데, 빵 맛이 좋다.
“최소 18시간 이상 저온숙성시킨 반죽으로 매일 아침 적당량을 구워요. 많은 양을 소비하기에는 동네가 너무 좁잖아요. 오후 되면 빵이 다 동나서 그런지 주로 단골들이 많아 찾아옵니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커피 한 잔을 마신 게 인연이 된 필자와 남영일씨는 밥 한번 먹자는 약속을 지켰다. 그를 따라간 곳은 좁은 골목 끝에 있는 허름한 식당으로 외지인은 찾기 어려운 위치였다. 이 집의 주 메뉴는 소곱창전골, 한때 우시장이 성업하던 시절부터 운영되던 곳이다. 시원한 국물과 함께 졸깃한 곱창의 식감이 부드럽다.
▲묵호항에서 온 생선장수와 장꾼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는, 춘양역에서 장터 가는 길
운곡천을 건너 춘양역으로 향한다. 과거 ‘춘양목’의 집산지로 외부로의 반출 통로였던 춘양역은 모든 게 새롭게 바뀌었다. 팔각형 지붕의 독특한 구조였다는 옛 역사는 사라지고 반듯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 있다. 대신 춘양교에서 춘양역에 이르는 350m 거리의 골목에는 과거 영화로웠던 시절을 조금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낮고 허름한 건물 상가가 그대로 있다. 음식점과 다방 등 대부분의 상가는 문을 닫았지만, 태양다방은 26년째 문을 열고 있다. 다방 주인 양인덕씨는 하룻밤에 다 세지 못할 만큼 돈을 잘 벌던 시절 얘기를 한다.
“밤 12시에 청량리행 막차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새벽까지 기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죠. 장사요? 억쑤로 잘됐지예, 그날 번 돈을 다 세지 못해 다음날까지 셌다 아닙니까.”
▲옛날 장터 풍경을 표현한 타일벽화.
처음 문을 연 1991년에 커피값이 400원이었다. 그러다 600원이 되고, 800원이 되었고, 2000년부터는 1500원으로 올랐다. 지금도 1500원이니 17년째 그대로란 얘기다. 당시 시장통까지 이어지는 골목에 다방만 17개였단다. 역 앞에만 여인숙이 다섯 개였고, 식당도 일곱 개나 됐다. 그 많은 식당, 다방, 여인숙이 자리가 없을 만큼 붐볐다.
“장날 사람이 제일 많았어요. 아침 첫 기차가 들어오면 묵호항에서 생선장수들이 줄을 서서 내렸고 인근 현동, 분천, 승부 등지에서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역에서 장터까지 가는 길은 서로 어깨가 부딪쳐 걷기도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랬다. 과거 역 주변에는 춘양목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더불어 일하는 일꾼들과 상인들로 춘양은 북적거렸다. 여전히 첩첩산중 오지의 면모를 벗어나지 못한 춘양에 그토록 사람이 몰리게 된 배경이 뭘까. 당연히 열차였다. 춘양역이 생기면서 사람과 물자가 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있다. 그 유래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는데, 1955년 철도가 개통될 당시 법전역에서 녹동역까지 직선으로 연결될 철도를 춘양 출신의 자유당 실세가 노선을 바꿔 선로를 오메가(Ω) 모양으로 만들어 춘양역을 통과하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춘양에 가면 동네를 한 바퀴 빙 돌아 나가는 모양을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설은 춘양목(春陽木)에 관한 것인데, 춘양목은 외피가 거북등같이 갈라져 있고 보통 소나무보다 생장속도가 3배 이상 느려 나이테가 치밀하고 곧게 자라 뒤틀림이 없어 조선시대 궁궐이나 한옥저택, 정자 등의 재목으로 많이 쓰였다. 한정된 재목에 너도나도 춘양목으로 집을 지었다고 자랑하는 데서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비슷한 유래로 인근 울진·삼척 지방에서 벌목된 금강소나무가 반출을 위해 춘양역으로 모이면서 춘양목으로 불리게 되었고, 산지가 아닌 집산지였기에 억지라는 의미에서 ‘억지춘양’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다. 연유야 어찌되었든 춘양과 춘양목, 춘양역은 긴 세월 함께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 가래떡을 뽑기 위해 방앗간에 앉아 있는 어르신들의 “어디서 왔니껴?”라는 봉화 사투리가 정겹다.
묵호항에서 온 생선장수와 장꾼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는 장터까지 걸어간다. 거리는 1㎞ 남짓, 상가 밀집지역을 지나지만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다. 옛 장터인 ‘춘양전통시장’은 말끔히 새 단장을 했다. 심하게 꾸민 흔적이 역력하다. 뒷골목에는 벽화가 아닌 벽타일을 붙여 놓았다. 어설픈 화장을 했다고나 할까. 시골 장터가 좀 촌스러운 맛도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장터 상가들은 보통 40~50년 장사를 해온 곳들이다. 기차에서 내린 촌로들의 뒤를 따라갔더니 죄다 방앗간으로 들어간다. “어디서 왔니껴?” 봉화 사투리가 정겹다. 뻥튀기 좌판도 있다. 겨울 농한기에는 하루 종일 뻥 소리가 울려 퍼진다.
유홍준씨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봉화를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한 살아 있는 민속촌이라고 극찬했다. 그만큼 때 묻지 않은 문화유적이 많다는 얘기다. 작은 면(面)소재지에 불과한 춘양에도 고택과 정자가 많다. 만산고택과 성암재, 권진사댁 모두 고택 숙박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만산고택(晩山古宅)은 조선 후기 만산 강용이 1878년에 건립한 가옥으로 대한민국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춘양교 건너 고목나무 숲 사이 눈에 띄는 정자가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한수정(寒水亭)으로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문은 굳게 잠겨 있지만, 외부에서 전체는 볼 수 있다. 건물은 T자형 평면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에 팔작지붕 건물과 바닥을 한 단 높인 온돌 2칸과 사방에 마루를 둔 건물이 붙어 있다.
여행 Tip |
[글·사진] 눌산 여행작가
주간조선 [2445호] 2017. 2. 20 발행
--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44510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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