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택한 느리고 게으른 삶
/ 지리산 피아골 한귀연 씨
19번 국도를 달린다. 곳곳에 ‘전망 좋은 곳’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이른 봄여행에 나선 여행자들은 안내판이 친절하게 가리키는 곳에 자동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다. 지리산과 섬진강, 19번 국도가 나란히 달리는 구례에서 하동 가는 길이다. 섬진강 하류에 다가갈수록 대숲의 초록이 일렁인다. 햇볕에 반사된 강물은 은빛으로 빛난다. 아직은 이르지만, 남도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기억 저 편에서 편안하게 쉬어 가시라
19번 국도가 지나는 이 구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이다. 곧 매화가 꽃을 피울테고, 이어서 산수유꽃과 벚꽃, 배꽃이 그 뒤를 잇는다. 꽃이 피어나는 순서는 어김없는 자연의 순리다. 봄이면 지리산 남쪽자락과 섬진강 일대에는 꽃구경 나선 여행자들이 골골마다 가득 찬다. 아마도 지루할 틈 없이 피어나는 꽃의 향연에 반해 찾아들지 않았을까. 구례에서 하동으로 향하는 지리산 자락 골짜기 마다에서는 새로이 터를 잡은 이들을 적잖이 만날 수 있다. 지금 만나러 가는 한귀연(44) 씨 역시 도시를 떠나 지리산 자락 피아골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피아골은 지리산의 주봉 가운데 하나인 반야봉에서 연곡사에 이르는 계곡으로 ‘피아골 가을단풍’은 지리산 10경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좁은 골짜기 산비탈에는 차밭이 펼쳐진다. 여름 계곡과 가을 단풍철이면 행락객들과 등산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지만 요즘 같은 겨울과 봄 사이에는 인적이 드물어 한가롭기 그지 없다. 그래서 피아골은 이즈음이 가장 고요하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휑한 바람만이 나그네를 맞는다.
한귀연 씨가 피아골 평도마을에 내려온 3년 반 동안 수없이 받은 질문은 심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심심하게 살려고 왔어요. 유난히 긴 산촌의 겨울 동안에는 겨울잠을 잘 수도 있고요, 좀 게으른 삶도 좋을 것 같더라고요.”
경기도 안양에서 자동차 정비와 렌터카 사업을 하던 한귀연 씨는 2013년 가을 고향 구례읍에서 가까운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평도마을에 정착했다. 오랜시간 준비를 하거나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즈음 대기업이 앞다투어 중소업체들이 운영하던 사업에 뛰어들면서 위기 의식을 느낄 때였다. 사업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머지않아 잠식될 시장판도를 미리 내다보고 귀향을 결심했다. 평도마을에는 부친이 30년 전에 구입해 놓은 건물이 있었다. 뚜렷한 귀촌의 목적이 없었기에 그저 방치된 건물 청소를 하고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꾸몄다. 그러다 문득 혼자만의 공간이 아닌, 여행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자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지금 한귀연 씨가 운영하는 ‘카페 라(Ra)’이다. 꼬박 1년 동안 집수리와 카페 꾸미는 작업을 했다.
“전혀 경험이 없었죠. 단지 그동안 틈나는 대로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여행자의 입장에서 여행자들이 좋아할 만한 공간을 꾸몄어요.”
자전거 여행 같은... 여백이 함께하는 곳
마을 도로변에 자리한 카페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가보고 싶은 분위기다. 독특한 문양과 알 수 없는 상형문자 같은 그림들이 외벽과 실내에 빼곡이 그려져 있다. 검정 바탕에 흰색의 조화가 오묘하다.
“‘라(Ra)’는 이집트의 태양신으로 벽에 그려진 그림들은 상형문자 같은 것입니다. 무덤이 카페 컨셉트거든요. 죽음을 의미하는 무덤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돌볼 수 없을 만큼 바쁜 도시의 기억을 끊고 평온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즉, 현실의 기억을 버리고 편안하게 쉬어 가시라는 의미라 할 수 있죠.”
그래서일까. 카페를 찾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비오는 날이나 궂은 날 카페 분위기는 더 살아난다. 여행자들은 2층 옥상에 마련된 탁자에 앉아 비구름이 내려 앉은 마을 풍경을 감상하거나 멀리 왕시루봉에 걸린 운무에 취해 현실의 잡다한 기억들을 망각한다. 바로 한귀연 씨가 꿈꾸던 장면이다.
“피아골은 3년 반 전에 처음 와봤어요. 내가 태어난 고향이 이렇게 멋진 곳인 줄 그동안은 몰랐던 것이죠. 사계절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자연을 보며 자연의 위대함과 고귀함에 감동했어요. 옥상 공간도 저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풍경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게 된 거고요.”
카페에 놓인 탁자와 의자는 모두 한귀연 씨의 작품이다. 투박하지만 손때 묻은 느낌이 좋다. 온돌방도 하나 만들었다. 등산객들이 많다 보니 다리 쭉 펴고 긴 산행의 피로를 풀고 가라는 생각에서다. 곳곳에 여행자를 위한 배려가 느껴진다.
안양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오면서 그동안 타고 다니던 자동차도 처분해 버렸다. 필요하면 자전거를 타거나 걷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동안 익숙해진 도시의 편안함에서 벗어나 좀더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겠다는 의미에서다. 피아골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전기자전거다. 한번 충전으로 최대 70km까지 달릴 수 있는 이 자전거로 매월 둘째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카페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난다. 그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그의 여행은 특별한 목적지가 없다. 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풍경에 취한다.
“자전거 여행의 장점이자 단점은 느리다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들을 만날 수 있어요. 걷기와 별반 차이가 없기 문에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얘기도 나누게 됩니다. 앞으로는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과 풍경을 기록으로 남길 생각입니다. 스케치 여행 같은 것이죠.”
한귀연 씨는 스스로를 느리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했다.
“피아골에서는 굳이 바쁘게 움직일 이유가 없어요. 누가 하나 재촉을 하거나 서두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이곳에서는 뭐든 천천히 하게 됩니다. 드립커피를 고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대부분의 커피집은 ‘드르륵’하면 순식간에 커피 한잔이 뽑아 나오잖아요. 하지만 드립커피는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 시간에 창 밖 풍경을 한번 더 볼 수도 있고, 심호흡을 하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지요.”
한규연 씨는 지난해부터 카페 옆 공간에 게스트룸 꾸미는 작업을 시작했다.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단골 손님들 성화에 못 이겨 시작한 것이다. 카페 컨셉트처럼 오직 현실의 기억 너머 이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잡다한 공구와 자재가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작업이 시작된 것은 분명 맞아 보인다. 하지만 언제 완성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아마도 1년? 그 이상일 수도 있어요.(웃음)”
글·사진 눌산 http://www.nulsan.net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909-2 (도로명 :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669)
한국산지보전협회 산사랑 웹진 13호 3+4월호 (http://kfca.re.kr/sanFile/web13/02_01.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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