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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오지

봉화의 오지마을 백리장천(百里長川) 구마동(九馬洞)

by 눌산 2008.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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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봉화 백리장천(百里長川) 구마동(九馬洞)
 

경상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봉화군. 지리적으로는 강원도 땅과 접해 있고 태백산에 등을 맞대고 있는 전체 군(郡) 면적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산지(山地)의 고을이다. 가을이면 전국이 들썩이는 축제들로 요란한데, 봉화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가 송이축제. 산이 많고 옛부터 춘양목의 산지로 알려져 있는데 바위 절벽에 달라붙은 소나무의 자태를 보면 그 빼어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미끈하다. 그런 소나무의 향을 듬뿍 머금은 봉화의 송이는 값을 꽤 잘 쳐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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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장천 구마동 계곡



봉화 땅을 제대로 돌아보자면 웬만큼 다리 품을 팔아서는 힘들다. 그만큼 산과 골이 겹겹이 두르고 있어 소위 말하는 코스여행이 어렵다. 들락날락을 되풀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영주에서 봉화까지 도로가 뻥 뚫려 찾기가 수월해졌다. 실제로 봉화에서 서울까지 운행하는 시외버스의 소요시간이 3시간이 체 안 걸리는 것을 보면 세상 참 좋아진 것이다.

산이 많은 고장 봉화에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걸출한 명산들이 즐비하다. 66봉(12봉우리) 봉우리마다 역사와 전설이 깃든 청량산을 비롯하여 태백산 사고지가 있었던 각화산, 청옥산 등 접하기 어려워 그 동안 잠시 잊혀져 있었을 뿐 소문만 나면 때로 몰려 올 사람들의 행렬이 오히려 걱정될 정도. 그만큼 봉화 땅은 구석구석 사람들의 손이 덜 탄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을 고스란히 지켜올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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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대미마을의 빈집



태백산에서 장장 백리(百理)길로 길게 드러 누운 구마동

이제, 코끝을 스치는 가을향기보다 더 진한 봉화의 흙내음을 맡아보자. 강원도 태백, 영월과 인접한 봉화의 북부지역은 우리 나라에서 평균기온이 가장 낮은 곳 중의 하나다. 올 첫서리 또한 가장 먼저 내린 소천면과 춘양면 일대는 태백산에 등을 맞댄 해발 8-900m를 오르내리는 고산지대로 예로부터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의 신봉자들이 찾아들어 자리잡은 미래의 땅으로 전해져 온다.

특히 이번에 소개하는 소천면 고선리 구마동(九馬洞) 일대는 아홉 마리의 말이 한 기둥에 메여있는 형상을 한 구마일주(九馬日注) 명당 터가 있다고 알려져 온 곳이다. 그만큼 명당 터를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지만 결국 찾지는 못했고, 아홉 필의 말이 있어 오히려 땅을 어지럽힐 수 있다는 속설로 명당 터를 찾지 못함에 대한 위안을 삼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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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이 깊은 구마동에는 고랭지 채소밭이 많다.



봉화에서 울진으로 향하는 36번 국도를 따르면 1,700m 길이의 노루재 터널이 나온다. 한겨울 폭설이라도 내릴라 치면 해발 630m의 노루재는 이 고을 사람들을 꽁꽁 묶어버렸는데, 터널의 개통으로 한걸음에 소천면의 면소(面所)가 있는 현동에 닿을 수 있게 되었다. 현동에서 다시 태백 방향 35번 국도로 갈아 타고 현동천을 따라 잠시 가다보면 좌측으로 멀리 깊은 골이 한눈에 들어온다. 골짜기의 길이가 백리에 달한다는 바로 백리장천(百里長川) 구마동(九馬洞)의 끝이자 입구이다.

말 그대로 태백산에서 발원한 계곡이 백리(百理)에 달한다는 얘기인데, 입구부터 그 깊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골은 끝없이 이어진다. 골의 들목은 백담(栢潭)마을,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 생긴 지명으로 잣담으로 불리다 잔대미로 와전이 되면서 지금은 잔대미로 불리는 곳이다. 청옥산에서 내려 온 현동천과 구마동 계곡이 만나는 곳으로 하얀 백자갈 밭이 펼쳐진 마을 앞 강변은 여름철이면 피서객들로 주인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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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떠난 빈자리가 쓸쓸한 사람의 마을

이제 서서히 골문은 열린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지만 억겁의 세월 흘러 온 물줄기만은 그대로 일 것이다. 사람의 마을이었을 넓은 터는 대부분 묵밭으로 버려져 있어 떠난 빈자리가 더 커 보인다. 평생을 살아 온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나이든 노인들만이 지키고 있는 골짜기의 풍경은 더없이 쓸쓸해 보인다.

오지마을이 다 그렇듯, 구마동의 초등학교도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 모 방송국의 수련원으로 쓰이는 고선분교 뿐 아니라 골의 끄트머리 마을인 도화동에도 학교가 하나 더 있었다. 골짜기 하나에 학교가 둘이나 되었다는 얘긴데, 사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로 일제시대 인근 춘양면의 우구치(牛口峙)에 금광개발이 한창이던 시절 구마동에도 작은 금광이 있었단다. 금광의 인부들로 마을은 활기에 넘쳤고, 덕분에 근동(近洞)에서 비교적 형편이 나은 곳이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옛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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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 된 고선분교


고선분교가 있었던 마방에서 도로는 비포장 길로 바뀐다. 백담에서 20리쯤까지는 산자락 비알밭일지언정 약간의 평지가 있었지만 마방을 지나면서부터는 완전한 협곡으로 변한다.
계곡 또한 밋밋하다가 집채 만한 바위를 휘감고 도는 물살에 패이고 깎인 깊은 소(沼)와 담(潭)이 가을빛과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구마동의 본격적인 면면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마음까지 설레게 해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재촉한다.

왼편으로 각화산(1,177m)과 왕두산(1,044m), 형제봉(834m)이 우측으로는 청옥산(1,277m)이 길게 감싸고 있고, 뒤로는 민족의 영산이라는 1,567m의 태백산이 두르고 있는 골의 지형은 노루목에 이르러 여러 번 몸을 급하게 비튼다. 노루목은 마을 앞산이 어미노루와 새끼노루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 지금은 한 가구만이 민박을 치며 살고 있지만 금광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노루목의 방우재가 이웃마을인 춘양으로 통하는 주요관문이었다.

완만한 경사에 잘록한 각화산의 산등을 타고 넘어 춘양까지는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구마동 사람들은 장을 보기 위해서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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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이 완연한 구마동 계곡



지금의 길보다 70년 전이 더 좋았다.

그 시절의 노루목과 구마동은 어떠했을까?
태백산 바로 코앞에서 나뉘는 중봉과 도화동 골짜기의 갈림길인 간기(間基)에서 만난 안세기 할아버지는 70년 전을 회상한다. 13살 때 금광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춘양에서 구마동으로 들어왔다는데,

"그때 길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았니더."

"매일같이 길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까지 치웠으니 맨질맨질 했지예."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이라 펑크를 방지하기 위해 도로 관리를 했다는 얘기다.

70년 전보다 지금이 더 못하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금광이 있었기에 인근에선 아마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동네가 아니었나 싶다.

"50전 받고도 서로 일할라 안했닌겨."
할아버지의 부친 또한 그랬듯이 이 골로 들어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폐광이 된 이후에도 그렇게 눌러 앉았고, 회전을 일구며 살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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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동 계곡



간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큰터. 넓은 터가 있어 그렇게 불렀다는데, 이젠 구마동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가장 많은 네가구가 살고 있다. 큰터에 오르니 구마동 골짜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뼝대(절벽)가 가로막은 좌우 골을 사이에 두고 길게 뻗어 내려가는 계곡과 산자락의 경치가 기가 막히다.

마방 이후로만 100가구가 넘게 살 때도 있었고, 자동차로는 갈 수 없는 골 끄트머리 도화동의 분교엔 아이들이 30여명이나 되던 때도 있었다. 복숭아나무가 많다는 도화동(桃花洞)은 그 동안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던 계곡이 작은 폭포를 여럿 만들며 산으로 치솟는다. 바로 태백산에서 이어 온 물줄기의 시작지점이기 때문.

점점 높이 올라갈수록 가을빛이 완연하다. 걸어서 올라야 하는 도화동이 구마동 백리 길 중에서 경치가 가장 빼어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의 손길이 덜 미친 이유일 것이다. 한낮의 햇살에 반사된 물빛은 눈이 부시다. 인적이 끊긴 산중 한가운데 들어앉으니 고요함에 숨소리까지도 소음으로 들리고, 잠시 눈을 감고 자연과 사람이 어울린 한마당이었을 구마동 사람들의 지난날 삶을 그려본다.

<글,사진> 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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