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천(明川)을 거슬러 원통사 가는 길, 가을이 무르익었더라
성큼 다가선 가을을 즐기기에는 안성 땅이 제격이다. 무주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리고도 남았다는, 무주에서 가장 넓은 들을 가진 안성 땅은 지금 온통 황금빛이다. 사교마을 입구에서 두문마을과 덕곡마을을 지나 외당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차를 세웠다. 한없이 넓은 들과 높은 가을 하늘이 눈 앞에 펼쳐진다. 나지막한 산과 그 아래 마을들, 그 사이사이 푸른 소나무 숲이 점처럼 찍혀 있다. 마을에서 마을로는 크고 작은 하천이 실타래처럼 안성 땅을 적시며 흐른다. 부챗살처럼 안성 땅을 감싸고 있는 덕유산 자락에서 흘러온 통안천과 명천, 사전천이 서쪽을 향해 흐르다 구량천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 도치마을에서 시작해 안성면 소재지와 평장마을, 상·하이목, 신무마을, 명천마을을 지나 원통사까지 명천을 거슬러 오르며 이른 가을 풍경을 눈과 가슴에 담아 보았다.
이른 가을을 만나러 가는 길
‘명천(明川)’은 안성면 죽천리와 장기리를 흐르는 하천으로 덕유산 국립 공원 삿갓봉과 무룡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진도리 도치마을 앞에서 구량천과 합류한다. 구량천과 명천이 만나는 도치마을 앞 하천은 지금 갈대꽃이 한창이다. 빛을 잘 활용하면 아주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다. 한낮에는 갈색이지만, 석양에 비친 갈대꽃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안성면소재지 시장마을로 향하는 길은 나무 중에 단풍이 제일 먼저 든다는 벚나무가 가로수다. 이미 노랗고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시장마을을 벗어나 평장마을로 향한다. 서쪽 고속도로 맞은편 동쪽으로는 멀리 적상산과 덕유산 설천봉에서 향적봉, 동업령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덕유산의 파노라마를 알프스에 비유하곤 하는데 한겨울 눈이라도 쌓인 날이라면 충분히 견줄 만하다.
하이목과 상이목, 신무마을로 향하는 명천은 폭이 더 좁다. 수풀이 우거져 가까이 접근하기 힘들다. 실개천 수준의 좁은 물길은 골짜기 깊숙이 숨어 흐르다 신무마을에 이르러 비로소 하천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신무마을펜션 앞으로는 소나무 숲과 천연 물놀이장까지 있어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펜션을 운영하는 김영임 씨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계곡을 더 좋아한다면서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사람들은 물고기 잡고 놀던 추억이 떠올라서 그런지 너무들 좋아한다”라고 했다.
신무마을을 지나면 명천계곡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명천마을이다. 명천마을에도 신무마을 소나무 숲의 몇 배는 되는 넓고 우람한 군락이 있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 펜션까지 200여 미터 구간이 대부분 소나무 숲이다. 마을 북서쪽 바람을 막아주는 전형적인 방풍림으로 한국전쟁 이후 공비 소탕 작전 때 전부 베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소나무 숲은 그 이후 자연스럽게 자란 소나무들로 수령이 60여 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제법 반듯하게 잘 자라 명천마을의 명물이 되었다. 명천마을에는 마을 숲과 함께 마을의 터를 비보(裨補)할 목적으로 잡석을 쌓아 올려서 만든 돌탑 2기도 남아 있다. 도탐으로도 불리는 이 돌탑은 민간 신앙 유적으로 안성면에는 현재 수락마을과 정천마을 등에도 남아 있다.
명천마을 소나무 숲은 현재 캠핑장으로도 이용된다. 바로 옆에 계곡이 흐르고 숲 그늘이 좋아 조용히 캠핑하기 좋은 곳으로 꽤 소문이 났다고 한다. 혹시 지나는 길이라면 캠핑과 무관하게 잠시 쉬어가는 것은 괜찮다.
명천마을을 벗어났다. 아치 모양을 한 느티나무의 큰 가지가 양팔을 벌려 여행자를 환영하는 듯 서 있다. 수확을 앞둔 사과밭 풍경도 만난다. 발갛게 익어가는 사과가 먹음직스럽다. 요즘은 보기가 드문 구기자 열매도 보인다. 쌀알 모양으로 길쭉하고 빨간 열매다. 농가 마당에는 가을꽃이 한창이다. 구절초와 맨드라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농사일에 바쁜 와중에도 언제 이렇게 예쁜 정원을 가꾸었을까. 농가 주인의 고운 성품이 느껴진다.
명천마을에서 원통사 가는 길인 이 길은 주말이면 차량 통행이 빈번하다. 마을에서 800미터 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국적으로 소문난 카페를 찾는 방문객들 때문이다. 고구마 줄기를 말리던 어르신은 “이 촌 골짝에 뭐 볼 게 있다고들 그렇게 오는지 몰러.” 하신다. 사실 그들은 꼭 뭐를 보기 위해서 이 깊은 골짜기까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도시인들에게 이 골짜기는 이상향이다. 맑은 공기와 바람, 도시의 둔탁한 소음과는 거리가 먼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서 온다.
카페 앞 원통1교 다리를 건너면 멀리 원통사가 있는 원통골이 눈에 들어온다. 원통2교를 지나면 ‘명천호‘다. 호수를 끼고 가는 약 1,2km 구간의 도로 양쪽에는 억새가 한창이다. 가을에는 꽃보다 억새가 한몫한다. 오후 시간이라 해가 정면에 있다. 역광으로 억새 사진을 찍기에는 아주 좋은 시간이다.
원통3교를 지나 마지막 다리인 초연교를 지나면 원통사에 다다른다. 신라 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인 원통사는 전쟁으로 인한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원통사 원통사지(圓通寺址)가 1983년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원통사로 향하는 마지막 약 1km 정도는 급경사 오르막길이다. 대신 하늘을 가린 숲길이 꽤 근사하다. 걷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해발 800미터에 이르는 고산 숲길을 걷는 재미도 있다. 길가에 핀 개미취나 구절초 같은 가을꽃을 만나는 맛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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