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구천동도 부럽지 않은 골짜기
'무진장'으로 대표되는 호남의 오지 덕유산 자락, 구석구석 이미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구천동의 한 지류인 벌한천 끄트머리에 있는 벌한(伐寒)마을은 아직도 인적이 드문 곳이다. 폭 5~6m의 작은 계곡에 지나지 않지만 사철 마르지 않는 맑은 물이 넘쳐흐른다. 가만가만 발뒤꿈치를 세우고 걷듯 자연과의 교감은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깥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 전북 무주군 설천면의 거칠봉(1,178m) 일곱 봉우리와 마주한 벌한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거칠봉 아래 나즈막히 자리 잡은 벌한마을
벌한마을은 나제통문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두길리 구산마을이 들목. '구천동 한과공장' 입간판을 따라 들어가면 폐교된 지 오래인 두길초등학교가 웃자란 잡초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질 만한 좁은 도로는 구천동 계곡을 가로질러 벌한천을 파고든다. 휘황찬란한 조명이 현란하게 춤을 추는 구천동 리조트 단지와는 정반대의 70년 대 풍경이 펼쳐진다. 이 길이 포장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동안은 비포장 도로로 승용차로 가기에는 버거운 길이었다.
마을 어귀에 세워진 표지석
추위를 물리친다는 뜻을 가진 벌한(伐寒)마을은 성산 배 씨 집성촌이다. 해발 550m 고지대에 북쪽으로 골문이 열려 있어 매서운 겨울 북서풍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형이 사람이 살기에는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300여 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은 예 사람들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는 것이 거칠봉(居七峰 1177.6m)과 사선암(四仙岩)이다. 마을 뒤로 감싸 안은 듯 병풍을 둘러친 거칠봉은 마을을 향해 차례로 키를 낮추며 정면으로 트인 골바람을 막아준다. 참으로 독특한 지형이 아닐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북향 골짜기지만 비교적 따뜻하고 농사가 잘되 그동안 잘 살아왔던 이유를 거칠봉과 사선암의 신선 덕이라고 믿는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돌담
조상 대대로 이 마을에서 살아 온 배OO 할아버지는 "거칠봉 일곱 명의 신선과 사선암 네 명의 신선이 더해 열 한명의 신선이 우리 마을을 지켜주고 있어 수백 년 편안하게 살아왔지."라며 마을 자랑을 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협소해 보이는 골짜기지만 숨겨진 농토가 많다. 할아버지 집 맞은편에는 '큰들'이라 불리는 운동장만한 둔덕이 있고, 골짜기 구석구석에도 지금은 묵밭으로 버려진 농토들이 많다. 아이들의 공간인 두길초등학교가 폐교되면서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떠났다. 한때 60여 가구가 살았던 마을에는 지금 열 세 가구만이 남았다.
마을에는 뭐 하나 성한게 없다. 낡고 닳은 풍경들
배 씨 할아버지 댁은 지은지 300년이 넘었다. 손때 묻은 농기구들을 비롯해 집안 구석구석에 놓인 생활도구들은 있는 그대로가 민속박물관이다. 할머니의 고향은 산너머 무풍이다. 지금이야 길이 잘 나 무주나 설천장을 보러 다니지만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는 걸어서 마을 뒤 사선암 고개를 넘어 무풍장을 보러 다녔다. 그 옛날의 사선암 길은 이젠 잊혀진 길이 되었다.
낡아서 좋다. 수백년 세월 그 자리를 지켜줘서 고맙다.
"천하의 구천동이라지만 이제는 벌한천만 못해." 수백 년 전 이곳에 터잡은 선조들의 지혜과 자연관 덕분이라는 할아버지 말씀을 통해 우리 땅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나제통문에서 무주리조트 방향으로 5분 정도 가시면 우측에 '구천동 한과공장' 입간판이 서 있고, 좌측으로는 두길, 벌한마을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표지판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구멍가게가 하나 있습니다. 이곳에서 구천동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벌한마을 가는 길입니다. 포장이 완료되어 승용차로도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이왕이면 걸어서 한번 가보십시오. 감동하고도 남을 만한 소소한 풍경들이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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