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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한마을 사람들이 무풍 장보러 다니던 길.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곧 잊혀진 먼 기억 속의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옛길이 그렇다. 옛길은 그 흔적을 더듬는 길이다.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깃든 길이다.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그 고갯길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이 다니지 않으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아무도 찾지 않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고개를 넘었다.
사선암 아래 벌한마을, 눈씻고 찾아봐도 성한 것 하나 없는 마을은 그대로가 민속촌이나 다름없다.
벌한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거칠봉과 사선암(四仙岩),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탕건바위는 수호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거칠봉 일곱 명의 신선과 사선암 네 명의 신선이 두루 감싸고 있는 마을은 북향이지만 춥지가 않다. 열 한명의 신선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벌한이라는 마을 지명 또한 추위를 물리친다는 뜻이고 보면 북서풍을 막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 농사를 기원했던 옛 선조들의 마음을 엿 볼 수 있다. 실제로 북서풍의 영향도 받지 않고, 수백 년 마을의 역사가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주민들의 믿음처럼 거칠봉과 사선암의 신선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선암 고개는 벌한마을 사람들이 무풍을 드나들던 길이다. 신라와 백제 국경에 접해 있던 이곳은 분명 설천 땅이지만 그 시절에는 신라 땅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고개를 기준으로 소통하던 시절 사선암만 넘으면 바로 무풍 땅이었기에 그렇다. 설천을 나가기 위해서는 십리 골짜기를 빠져 나가서도 20리 길을 더 걸어가야 한다. 그만큼 거리도 멀 뿐 더러 도로가 없던 시절에는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능선에 올라서자 햇살이 반긴다. 차가운 날씨를 녹이고도 남을 만큼 따뜻하다.
산에서는 일회용 커피가 맛있다.
마을을 벗어난 지 딱 한 시간,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 막는다. 바로 사선암이다. 오래전에 바위 밑에는 암자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암자터와 그 흔적으로 통나무만이 나뒹군다.
네 명의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는 사선암에는 신라 화랑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연유야 어찌되었든 신선이 노닐던 사선암 바위 위에는 장기판이 새겨져 있다.
사선암에서 잿마루를 넘어서면 철목리로 이어진다. 철목리에서 무풍까지는 걸어서 약 한 시간 거리. 벌한마을 사람들은 바로 이 고개를 넘어 무풍 장으로 보러 다녔다.
사선암에서 철목리로 향하지 않고 다시 벌한마을로 향하기로 했다. 올라 온 능선을 벗어나 골짜기로 내려섰다. 하지만 길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낙엽이 덮여 있다. 멀리에서 길을 잡아주고 계곡을 보면서 내려서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다행이 예상대로 계곡에 이르자 뚜렷한 길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벌한마을 사람들은 무풍 사돈을 맺었다고 한다. 지형 상으로는 백제 땅이지만 고개를 사이에 두고 신라와의 교류가 많았기에 그렇다. 실제로도 벌한은 신라 땅이었다고 한다. 경상도와 접경 지역인 무풍 사투리가 경상도 억양이 섞여 있듯 벌한마을 사람들 또한 무풍 말에 가깝다. 벌한마을이 신라였든 백제였든 지금은 무주 땅에 속한다. 이 시대에는 지역의 경계가 자로 금을 긋듯 나뉘어 있지만 옛 사람들은 사람의 교류에 기준을 두었다. 새로운 길이 뚫리면서 그 경계의 구분은 변했다. 사라진 고갯길 대신 마을 앞으로 뚫린 신작로로 인해 벌한마을 사람들은 이제 무풍 보다는 설천이나 무주로 장을 보러 다닌다.
[tip] 벌한마을에서 사선암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들목을 찾기가 힘들지만,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사선암까지 외길로 이어진다. 사선암에서 철목리로 내려서는 길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골짜기만 타고 내려가면 되지만 몇해 전 홍수로 유실되 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골짜기 중간 쯤의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철목리로 이어진다. 이번 트레킹 코스였던 능선으로 올라 골짜기로 내려서는 길은 2시간 30분 쯤 걸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나제통문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벌한마을 들목인 구산마을에서 출발하면 된다. 벌한마을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무풍까지는 약 4시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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