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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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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천 미터 적상산 피나물 군락 ‘천상의 화원’, 안국사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안국사에 들렸다 적상산으로 향한다. 산정은 여전히 연둣빛이다. 우리나라 최대 피나물 군락지인 ‘천상의 화원’은 해발 1천 미터 산꼭대기에 있다. 이상기온 때문인지 올 봄꽃 개화시기가 뒤죽박죽이더니 색감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대신 연둣빛 숲 속에서 만난 노란 꽃을 피운 피나물 군락은 가히 환상적이다.
4월의 주인공, 꽃보다 '연두' 산비탈에는 산 벚꽃이 꽃망울을 잔뜩 부풀리고 언제든 터트릴 기세입니다. 더불어 개복숭아, 조팝꽃이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과수원에는 복사꽃, 자두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가는 길마다 벚꽃이 꽃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봄을 기다렸나 봅니다. 형형색색 색깔 옷을 입고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죄다 뛰쳐나온 모양입니다. 일은 바쁜데 노닥거리다 보면 시간은 자꾸 지체됩니다. 발길을 붙잡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연둣빛입니다. 꽃의 화려함에 가려 평생 조연으로 물러나 있던 연두 말입니다. 찬찬히 바라보면 연두가 주인공입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훅하고 다가왔다 사라지는 것 또한 찰나니까요. 4월의 주인공은 연두입니다. 꽃보다 '연두'입니다.
꽃보다 눈부신 메타세콰이아 반영 꽃 피는 봄날이다. 벚꽃, 살구꽃, 복사꽃, 자두꽃, 앵두꽃, 조팝꽃, 개나리가 만개했다. 그렇다고 꽃이 전부는 아니다. 꽃보다 눈부신 '연두'도 있다. 작은 소류지에서 이제 막 새순이 돋기 시작한 메타세쿼이아의 멋진 반영을 만났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열흘 만에 연두가 초록이 되었다. 순식간이다. 봄이 짧아졌다. 꽃이 피고 지는 게 한순간이다. 꽃가루가 날리고, 미세먼지 날리는, 여전히 봄이지만, 한낮은 여름 날씨다. 사람도 자연도 뒤죽박죽이다. 순리라는 게 있는데 말이다.
촉촉한 산길 끝에, 나만의 아지트 있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열린다.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이 골짜기를 타고 흐른다. 촉촉한 산길을 오른다. 이런 날은 임도가 좋다. 7부 능선 위로는 여전히 연둣빛이지만, 그 아래로는 이미 초록빛이다. 이즈음에만 볼 수 있는 산빛이다. 탁 트인 시야와 적당히 넓은 폭은 우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안전하다는 의미다. 임도의 매력은 또 있다. 급경사가 없다는 점이다. 적당히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면서 산허리를 휘감아 넘어간다. 좀 더 느리고, 좀 더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촉촉한 산길이 끝나는 곳, 나만의 아지트다. 멀리 금강이 흐른다. 더 멀리 산 너머에는 구름이 흘러간다.
언제나 봄날 '언제나 봄날' 뒤란에는 수령 520년의 거대한 당산나무가 있다. 매일 만나는 나무지만, 이 봄에 만나는 느낌은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는 잎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 그 자체니까. 일주일 후면 잎은 더 무성해지고, 초록으로 변하겠지만, 내 눈에는 언제나 연둣빛이다.
연둣빛 단풍이 남하하는 속도는 시속 40km 정도이다. 그렇다면 봄의 속도는 얼마나 될까. 꽃의 개화시기로 계산하면 시속 1km 정도라고 한다. 생각보다 느리다. 하지만 봄은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다. 연둣빛이 7부 능선까지 점령했다.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적상산 함락이 코앞이다. 오늘 뒷산에 가보니 고사리가 한 두개 씩 보인다. 취나물도 애기 손바닥 만하게 돋아났다. 이팝나물은 이번 주말 쯤이면 뜯어도 될 정도로 예년에 비해 많이 빠르다. 산골에 살면, 딱 필요한 것만 보인다. 이 맛에 '여기' 산다.
'언제나 봄날'의 아침 어제 낮까지만 해도 하얗게 쌓였던 적상산 눈이 사라졌다. 그 틈에 산벚꽃, 산복숭아꽃이 자리를 잡았다. '언제나 봄날' 뒤란의 벚꽃도 활짝 폈고, 당산나무에는 연둣빛 물이 들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문 열어 달라고 창문을 두들기던 다롱이도 꼼짝 않고 제 집에 들어 앉아 있다. 실내 보다 밖이 더 따뜻하단 얘기다. 봄볕이 좋구나. 너도 좋냐? 겨우내 묵은 때가 봄비에 다 쓸려 내려갔다. 벚꽃은 만개했고, 마을 숲 느티나무에 연둣빛이 감돈다. 이제야 봄, 답다. 한 줌 햇살이 들어 앉았다. 오늘은 다롱이 대신 내 자리다.